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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지적 작가 시점 May 13. 2022

청계산에서 중년 여성이 수차례 칼에 찔렸다.

(법의학 이야기) 자해인가? 타해인가?

2009년 1월 어느 겨울날 저녁, 강력반 사무실.

비가 주적주적 내린 날이라, 사건이 덜 들어오겠지 하는 예상과는 달리 정신없는 하루였다.


새벽 2시쯤 이제 한숨을 돌리나 싶었는데, 박 형사가 밤 10시쯤 접수된 사건을 뒤늦게 건네준다.

청계산에서 50대 여자가 수차례 칼에 찔려 지금 병원에 있다는 사건이었다.


강력사건을 왜 지금 보고하는가 하는 원망도 잠시, 사건 기록을 검토했다.

청계산 정상 부근에서 50대 여성이 흉기에 배를 수차례 찔려 119 대원이 병원으로 후송을 했는데, 괴한이 검은색 우산을 쓰고 와서는 갑자기 찔러서 얼굴은 보지 못했다고 한다.


피해자의 복부 사진이 두장 첨부되어 있었는데, 다섯 군데 상처의 넓이, 길이 등으로 보아 과도 같은 칼에 의한 자창으로 판단이 되었다.

칼과 같은 날이 있는 흉기로 찌른 상처를 자창이라고 한다. 피해자의 상처 중 3개가 복벽을 뚫고 들어갔다고 했다. 그중 1개는 위벽을 관통해서 봉합수술을 했다.

사진에 이상한 점이 눈에 들어왔다. 다섯 번에 걸쳐 찔린 상처 치고는 너무나 예쁘게(?) 상처가 나 있었다. 왼쪽에 3개소, 오른쪽에 2개소 있었는데 모두 평행하게 나 있었던 것이다.


이는 법의학적으로 자해로 판단되는 근거가 되는데, 다른 사람이 찔렀다면 5번을 찔릴 동안 몸을 뒤틀거나 도망치려 하기 때문에 평행하게 상처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일단 자해 소동으로 심증이 섰지만, 피해자의 말을 들어보지 않고서는 100% 결단을 내릴 수 없어 병원으로 갔다.


피해자는 막 수술을 끝내고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었다. 잠들어 있는 피해자의 양손을 살펴보았다. 아무런 반항의 흔적이 없었고, 얼굴에는 나뭇가지에 긁힌 상처가 약간 나 있었다. 얼른 사진을 찍고 중환자실을 나왔다.

방어창을 보기 위해서였다. 칼로 찌르게 되면 피해자는 무의식적으로 칼을 잡거나 팔로 막아 상처가 생기는데, 이를 방어창이라 한다. 손바닥이나 손목에서 주로 볼 수 있다.
방어창(법의학, 법의학교과서 편찬위원회, 2021)

내가 나오기 만을 기다리던 피해자의 언니와 동생이 나를 붙잡고 하소연과 반협박(?)을 한다.


“이건 강력사건이에요, 어디 무서워서 산에 가겠어요."

"이런 건 반드시 공개수사를 해서 다른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범인은 잡을 수나 있나요?”

경찰은 언론에 사건이 공개되는 것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 묵묵히 사건을 해결하고 싶어도 취재가 시작되면, 언론 대응에, 시도청·본청 등 상급기관에서의 보고 요청 등 일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일단 피해자의 회복이 우선이고, 아침에 피해자가 깨어나면 다시 들르겠노라고 하고, 피해자의 옷가지와 신발, 휴대폰이 담긴 비닐봉지를 들고 사무실로 왔다.


옷을 펼쳤다. 칼에 찔려 뒹굴었는지 젖은 흙이 많이 묻어 있었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였다. 칼이 들어간 자국이 하나도 없었다.


자해로 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하나 더 생겼다.

범인이 피해자를 찌를 때 일부러 상의를 걷고 찌를 리는 만무하고, 피해자가 범인이 더 잘 찌르도록 하기 위해 상의를 걷어 줄리도 만무한 것이니까 말이다.

법의학적으로 칼로 자해를 하는 사람 대부분은 옷을 걷고 배를 찌른다.  
자살과 타살에서의 자창 비교 / 자살은 방향이 나란하고, 타살은 불규칙하다. (전게서)

피해자의 휴대폰 통화내역, 문자 등을 확인해 보았다. '합의가 되었어도 경찰서에 알아보세요.'라는 문자가 눈에 띄었다. 문자 상대방에게 확인해 보니 피해자가 자신의 집에서 가정부로 있었는데, 돈을 훔쳐서 관할 경찰서에 신고를 해 놓았다고 했다.


그렇다!

피해자는 자신의 절도 혐의가 가족들에게 알려지는 것이 두려워 자살을 기도했던 거였다.


다음 날 아침, 피해자를 찾아갔다. 병간호를 하고 있는 딸을 잠시 나가 달라고 한 다음, 범인을 보았냐고 묻자 눈도 마주치지 않고 무조건 모른다고만 했다. 자해 사건이라는 감이 왔다.

범인이 상의를 입고 있는 위로 찔렀냐고 묻자 고개만 끄덕이기에, 그런데 왜 상의에 칼자국이 하나도 없을까요라고 추궁하듯 따지자 갑자기 내 손을 움켜 잡았다.


“걱정 마세요. 다 알고 왔습니다. 자해하신 거죠?”라고 묻자,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가족들한테 절대 말하지 말아달라고 한다. 몸조리 잘하시라고 하고는 병실을 나와 남편과 딸을 복도 한편으로 불러 내었다.


자살을 기도했던 것이고, 원인이 된 절도 사건은 담당 형사에게 사정을 얘기해서 신경을 써달라고 했으니 피해자에게는 모르는 척해달라는 얘기를 하고는 병원을 나섰다.


자칫 청계산 묻지 마 상해사건으로 비화될 수 있는 사건을 신속하고 깔끔하게 처리했다.



*** 기존 '(법의학 이야기) 자해인가? 타해인가?' 글을 다이어트했습니다.

https://brunch.co.kr/@1000/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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