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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지적 작가 시점 May 23. 2022

강력팀 형사가 책상 위를 깨끗이 해야 하는 이유

<라떼마리즘> 경찰생활 이해하기

고참 형사들은 그랬다.

책상 위를 깨끗이 하라고.

피의자는 조사받다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기 때문에 송곳, 칼 같은 날카로운 물건뿐만 아니라 화분도 집어던질 수 있으니 치우라고 했다.


들어 보니 맞는 말은 같은데, 완전 라떼는 말이야로 들었다.

항상 써야 하는 물건들이라 그러려니 했다.

특히 화분은 승진, 영전에 따른 지인의 의미 있는 선물이라 치울 수 없었다.


그런데...

고참들 말은 틀린 게 없다.



2007년 지하철 2호선에서 출퇴근 길 소매치기를 전문으로 하는 권 모 씨(44세)를 검거하였다.


권씨는 인천에 거주하면서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서울의 유명 대학을 졸업하고, 전도유망했던 권씨는 소매치기로 구속되어 실형을 산 전력이 있었다.

그 후, 개과천선하여 번듯한 직장을 다닌다고 어머니를 안심시키고는 멋지게(?) 출퇴근을 하는 소매치기로 변신했다.


동일 수법 전과자 시스템에서 권씨를 특정하고, 실시간 위치 추적에 들어갔다.

백발에 가까운 피의자 특정에 어려움을 겪었다. 엄마의 가방을 열고 지갑을 훔쳐간 범인을 본 어린아이가 할아버지였다고 했다. 젊은 나이에 머리가 하얗게 세서 그렇게 보였던 거였다. / 나중에는 염색을 해서 수사에 혼선을 주려했다.
2007년 당시 형사수첩... 피의자를 특정해서 수첩에 붙여 놓고는 얼굴을 익혔다. / 왼쪽 아래는 지하철 cc-tv에 찍힌 피의자


실시간 위치만 보면 아주 착실한 회사원이었다.

집에서 7시쯤 집을 나와 신도림역에서 환승해서 지하철 2호선을 타고 방배역까지 오는데, 환승 지역이나 2호선 전동차 안에서 소매치기를 하고는 10시 전후 방배동에 있는 사우나로 출근을 했다.


사우나를 즐기고, 2시 정도에 나와 인근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퇴근을 했다.

퇴근길에 똑같이 소매치기를 하고는 7시 전후 귀가를 했다.

누가 봐도 전형적인 회사원이었다.


며칠간 위치 추적을 하던 도중 드디어 D-Day.


사우나를 나온 권씨를 바로 검거하려다 점심은 먹게 해 주어야겠다 싶어 같은 식당에서 밥을 먹고는 이를 쑤시며 나가는 그를 검거했다.  

극렬하게 저항하였으나, 강력팀 형사들을 당해낼 수는 없는 법.


사무실로 데려와 조사를 하는데, 홀어머니 걱정을 많이 했다.

어머니가 알면 안 된다, 아들을 착실한 회사원으로 알고 있다, 제발 연락하지 말아 달라 부탁을 하는 피의자.

모친 걱정 안 하도록 당분간 장기 출장 간다는 거짓 전화를 하게 해 주었다.


조사를 마치고, 저녁 시간.

입맛이 없다며 먹지 않겠다고 해서 우리만 테이블에 둘러앉아서 배달 음식을 먹었다.

몇 젓가락 떴을까... 양손에 수갑을 차고 있던 권씨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몸을 날리더니 내 책상 위 연필통에서 커터칼을 꺼내어 드르륵 날을 빼고는 목에 그으려 했다.


날렵한 윤형사가 거의 동시에 몸을 날리면서 팔목을 잡아챘다.


"어이, 어이, 왜 이러세요!!"


권씨는 나 같은 놈은 죽어야 됩니다, 죽어야 해요 하면서 눈물을 펑펑 흘린다.

어머니를 볼 면목이 없다는 생각을 하던 중, 구속을 앞두고 자살 충동이 생겼다고 한다.


휴... 그때 윤형사가 몸을 안 날렸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경찰은 이런 경우가 가끔 있다. 검거 잘해놓고 방심해서 피의자가 도주하거나, 자해·자살해서 오히려 비난을 사는 경우 말이다. 대표적인 사건이 유영철 사건이다. 희대의 연쇄살인 사건으로 팀 전원 특진 말도 나오던 상황이라, 1차 조사를 마치고 방심한 틈에 도주했었다.


그래서, 고참 형사들이 책상 위를 깨끗이 하라는 말이 잔소리가 아닌 거였다.

권씨를 구속하고 나서 책상 위를 정리했다.

흉기로 돌변할 수 있는 물건들을 서랍에 넣어 둔 것은 당연하고.



내가 명명한 라떼마리즘은 Latte는 Maria나 꼰대가 아니다. 나는 오늘도 라떼마리즘을 한다.

<라떼마리즘>
수사 대상자는 어떤 돌발행동을 할지 모른다. 책상 위 흉기나 둔기로 돌변할 수 있는 물건을 치워라!

- 유치장에 입감 되기만 하면 칫솔을 삼키던 피의자가 있었다. 병원에서 도주 전력이 있던 피의자는 칫솔을 삼키고 이를 빼내기 위해 병원에 가면 호시탐탐 도주 기회를 보곤 했다.
(불가능할 것 같지만, 고개를 뒤로 젖히고 칫솔을 목구멍에 쑥 넣으면 들어간다.)

- 생수통을 꽂아 놓고 쓰는 생수기에서 생수통을 뽑아 던져 사무실을 물바다로 만든 피의자도 있었다.

- 피해자와 대질 조사 도중 분에 못 이겨 책상 위 화분을 집어던져 사무실을 흙바닥으로 만든 피의자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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