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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지적 작가 시점 Aug 11. 2022

사회생활에서 술잔을 낮게 들어야 하는 이유

<라떼마리즘> 술잔을 되도록 낮게 들어라.

"이건 팀장 지시사항입니다. 잡아 오세요!!"


2007년 11월 어느 날 한 포장마차.

연상인 강력팀원 윤 형사에게 경찰생활 처음으로 '지시사항'이라는 말까지 써가면서 수사 지휘했다.


사실 하마터면 욱 해서 이건 명령입니다! 할 뻔했다.



그 당시는 보험 외판원 실적 막대그래프처럼 형사과장실에 각 팀별 검거 현황표가 있었다.

매월 평가를 하는데, 살인은 5점, 강도는 3점, 절도는 2점... 이런 식이었다.


11월의 마지막 날이 다가오는데 우리 팀은 0점이었다.

과장님의 압박 강도가 날로 강해졌다.


- 천 팀장네 팀은 일 안 하는 거야?

- 한 달 내내 뭐했나?

- 그래서 언제 실적 올릴 거야? 등등...


우리 팀은 빈집털이 절도범을 추적하고 있었다.

여죄가 많이 있는 범인이었기 때문에 한 명만 검거해도 다른 팀 실적에 준하는 실적을 거양할 수 있었다.

여죄 1건 당 0.2점이었다. 즉, 2점에 여죄가 10건이면 0.2 × 10 해서 2점이 더 추가되는 점수 체계였다.


드디어 범인의 위치가 대략 파악이 되었고, 과장님의 잔소리로부터 해방되는 날이 다가왔다.


그런데...

베테랑 윤 형사는 지금 잡지 말고 좀 더 묵혔다가(?) 여죄가 더 많아지면 따자고 한다.

여죄가 더 많으면 점수도 높아지지만, 향후 특진 등 검거실적에 도움이 된다. / 딴다는 표현은 검거한다는 형사들의 은어이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아침마다 과장실 들어가는 게 고역이었는데, 그걸 다음 달도 들으란 말인가?

같이 야간 잠복에 들어 간 날. 실시간 위치 추적 결과 그날은 피의자가 활동하지 않는 날이었다.

팀원들을 이끌고 포장마차로 들어갔다.


"오늘 피의자 안 움직이는데, 소주나 한잔하시죠."


머릿속이 복잡했다. 어떻게 설득을 해서 잡자고 해야 하나... 윤 형사 말처럼 그냥 과감하게 좀 더 키울까... 아냐, 과장님의 잔소리를 더 이상은 들을 수 없지... 등등


소주가 몇 순배 돌았는데, 다들 영 술 마실 기분이 아니라 별 대화 없이 술만 들이켰다.

또 한 잔... 두 잔...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 윤 형사님 그냥 따죠.

- 아이 참... 팀장님 좀 더 키웁시다.

- 아니, 저도 실적 때문에 쪼이지 않습니까. 뻔히 보이는 범인을 안 잡으면 어떻게 합니까?

- 팀장님, 이놈아는 우리 손바닥 위에 있는 거 아닙니까? 집에서 나와서 한 건 하고 들어 가는 게 다 보이는 놈인데, 몇 건만 더 하게 냅두죠.


갑자기 빨리 검거해야 할 당위성이 퍼뜩 떠올랐다.


- 어차피 나중에 검거해도 피해 회복도 안 되는데, 왜 피해자를 더 양산합니까. 우리가 안 잡으면 피해 안 당해도 될 사람이 피해당하는 거 아닙니까?

- 아이 참, 그래도 오래간만에 여죄 많은 놈인데 한 달만 더 키워 봅시다.

......


팽팽한 신경전이 벌어졌다. 워낙 고집 쎈 윤 형사라 대화로는 설득이 안되었다. 술도 한잔했겠다, 용기를 냈다.

- 이건 팀장 지시사항입니다!! 잡아오세요!!!

- 예, 예, 예~ 팀장 지시사항이라면 뭐 잡아 와야지요.


떨떠름하게 잡아온다고는 하는데, 나도 썩 기분은 좋지 않았다.

다음 날, 윤 형사는 박 형사와 빈집털이범을 잡아왔고, 나도 과장님의 잔소리에서 해방되었다.


*** 바로 이 사건이다.


피의자를 구속하고 송치한 날, 뒤풀이 술자리.


윤 형사가 그때 왜 나이 어린 팀장이지만, 팀장 말 듣고 범인 잡으러 간 줄 아냐고 물었다.

알 턱이 없었다.

- 글쎄요~ 왜 더 고집부리시지 그러셨습니까? 하하.

- 술잔을 드는데, 딱 보니까 우리 팀장님이 술잔을 낮춰 들더라고요. 그래서 아... 이 사람은 된 사람이다 생각이 들어서 팀장님 말 듣고 잡아 온 겁니다.


그랬다.

예전에 술 처음 마실 때 주도라고 해서 술잔을 부딪힐 때 연장자보다 낮춰 들고, 술병 잡을 때 상표 부분을 잡고 술 따르고 등등을 배웠었는데, 그게 주효했다!


사소한 예의였지만, 뼈대 있는 집안(?) 출신인 윤 형사는 술잔 부딪치는 그 순간을 눈여겨봤던 거다.

암튼 소주잔으로부터 시작된 이 이야기를 젊은 형사들에게 무용담처럼 해 주곤 하는데...


얼마 전 팀 회식 자리에서 역시나 다들 잔을 높이 들기에, 예전에 이런 일도 있었어요, 그러니 지금은 상관없지만 나중에 장인어른이나 다른 어른들과 술 마실 때 잔을 낮춰 들면 아 이 친구가 예의가 있구나 할 수도 있으니 참고로 알고 계세요 했다.


그다음 잔 부딪힐 때부터 다들 잔들이 내려갔다.

아이 참 그냥 알고만 있고 여기서는 잔 안 낮춰도 돼요 했으나...


- 아닙니다. 과장님 좋은 거 배웠습니다.

- 야, 이 형사! 너 더 낮춰~

- 야, 김 형사! 너 나보다 어리잖아 더 낮춰~


팀원들은 잔 높이가 신기했는지 연신 잔을 부딪히며 잔 높이를 보고 지적질(?)을 하며 웃어댔다.


내가 연하자들과 술 마실 때도 잔을 낮춰 드는 성향이 있어서 팀원들은 잔을 더 낮추다 보니 거의 땅바닥까지 닿을 듯했다.


오랜만에 웃음 가득한 회식 자리였다.


<라떼마리즘>
술자리에서 요즘은 신경 쓰지 않는 주도이나, 어려운 것 아니니 되도록 상대방보다 잔을 낮춰라! 혹시 아는가? 그 술잔 높이로 예의 바르다고 평가받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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