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좋아하면서도 항상 경비면에서 리즈너블한 여행을 위주로 해 왔기 때문에 여행 기념품은 눈으로만 만족을 하는 것이었고, 설사 산다 해도 만원이 넘어가는 기념품은 생각지도 않았었고, 아이들에게도 그렇게 해 왔었다.
경비를 여행에 더 투자해야지 굳이 기념품을 살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아이들은 나중에 서랍 속에 쳐 박히더라도 언제나 여행지에 가면 기념을 해야 한다며 선물을 조르곤 해서 기념품 샵은 서로 갈등을 일으키는 장소가 되곤 했다.
그런 존재였던 여행 기념품이 기념도 되고 실생활에 쓸 수도 있으면 그게 진정한 기념품이라는 새로운 정의가 우리 집에 자리 잡을 무렵, 말레이시아 여행을 가게 되었다.
첫날 코스는 쿠알라룸푸르 주석 공장 겸 박물관이 있는 로얄 셀랑고(Royal Selangor).
가기 전부터 대학시절 한 때 유행했던 주석잔 맥주를 떠올리며 조금 무리해서라도 주석 맥주잔을 사오리라 마음먹었다.
무료 가이드 투어에 중간에 직접 주석제품을 세공해 볼 수 있었다.
공장에 도착해서 투어를 끝내고 막상 기프트 샵에서 주석잔을 사려고 보니 후덜덜한(?) 가격에 망설여졌다. 더 나아가 세트로 사야 폼도 나고, 나중에 아내와 같이 시원~한 맥주를 마실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에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
기프트 샵에서 체스와 장기... 이때까지는 분위기가 좋았었다.
하지만, 예전 네덜란드에서 하이네켄 공장 투어를 떠올리게 하듯이 가이드가 직접 설명도 해주고, 공장에서 직접 만든 것이라 더 신뢰가 갔기 때문에 눈 딱 감고, 거금을 들여 사버렸다.
하이네켄 공장 투어를 나는 3번, 가족들은 2번 다녀올 정도로 만족도가 높은 투어였다. 가이드가 인솔해서 하이네켄의 역사, 맥주 제조과정 등을 일일이 설명해주고, 나중에 바에서 맥주를 시음할 수 있게 해 준다.
나를 위한 기념품인 주석잔 세트, 보기만 해도 흐뭇하다.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에 발생했다.
첫째 녀석 자기도 주석잔을 사겠다고 난리다. 중간에 망치로 살살 두드리면서 만들어 봤던 그 주석잔에 필이 꽂혔다.
독특하게도 각종 유리잔이나 접시에 취향이 있던 녀석이라서 예상은 했지만 너무 집착한다.
자기 만의 말레이시아 여행 기념 주석잔을 가지고 항상 시원한 물을 거기에 부어서 마시겠다는 거다.
이미 두 개를 산 상황이라 계속 잔 하나 더 사자고 우기는 녀석들을 억지로 말리고는 나와 버렸다.
공장 투어 끝내고 나오면서 인증샷... 녀석들 주석잔 안 사줬다고 기분들이 영 아니다.
하지만, 그다음 계획한 일정을 소화하는데 내내 마음이 찜찜했고, 첫째도 화 버럭 내며 안 산다고 말은 했지만, 내심 계속 사고 싶어 하는 것 같아 투어 계획을 약간 수정해서 시내에 있는 로얄 셀랑고 매장에 들렀다.
로얄 셀랑고 주석 제품은 말레이시아 내 모든 매장에서는 같은 가격이라고 하던데, 역시 첫째가 탐내던 그 주석잔이 공장에서와 같은 가격표를 달고 나를 데려가세요 하듯이 진열되어 있었다.
비용 지출 면에서는 부자 간에도 확실히 해야 한다는 룰을 정해 놨던 터라 첫째에게 일단 내가 카드로 사 줄 테니 약속한 대로 모아 놓은 용돈과 주식 몇 주를 처분해서 주석잔 값을 달라고 하자, 알았다고 하며 그때서야 내내 찌푸렸던 인상을 확 편다.
당시 중학 1학년인 녀석에게 주식을 사주어 이미 주식 거래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잘 쓰다가 나중에 결혼해서도 가져가서 계속 잘 쓰라고 해 줬다.
첫째 녀석의 기념품
이렇게 주석잔 세 개를 산 돈이 여행 경비에 맞먹는 금액이 되어 버렸지만 이게 진정한 여행 기념품임을 믿는다.
아내하고 시원한 하이네켄 맥주를 저 주석잔에 부어서 사이공강 바라보며 한잔할 생각만 해도 흐뭇하고 설렌다.
<에필로그>
결국 다른 여행 기념품들이 늘 그랬듯이 첫째가 산 주석잔은 집 어딘가에 박혀서 나올 생각을 안 했지만, 난 어제도 오징어 통찜에 시원~한 맥주를 주석잔에 부어 마시며 말레이시아 추억 여행을 다녀왔다.
오징어 통찜에 주석잔 맥주 한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