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를 쓰려면 우선 종이부터준비해야 한다.
100장짜리 글은 10장으로 쉽게 압축할 수 있는 반면,
10장짜리 글을 100장으로 늘리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10분 후 휴지통으로 직행하더라도 쓰고, 쓰고, 또 써야 한다.
작가 닐 스트라우스
글을 쓰지 않고 쉬는 동안 머리에 뭐가 되었든 꽉 차있었던 상태였던 걸로 기억하고 있다. 삶에도 좋고,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영양 가득한 다양한 인풋을 팍팍 넣어서 머릿속이 과부하 상태였다면 얼마나 좋았겠냐만은 다이어트를 끝내자마자 매일매일이 치팅데이가 된 것처럼 자극적이고 하등 영양가 없는 정보 속으로 다이빙했다.
실컷 먹어치운 뒤 불쾌한 더부룩함에 괴로워하듯 잡스러운 정보에서 허우적거리다 밤이 되면 아무것도 쓰지도, 그리지도 못 했다는 사실이 명치를 무겁게 꾸욱 눌렀다.
처음엔 쾌락으로 들여다보기 시작한 핸드폰이 어느 순간부터 머리를 굴려서 무언가를 만들어내게 하는 모든 일로부터 도피할 수 있는 도피처가 되었다. 한창 학교를 다닐 무렵엔 인터넷을 곧잘 '정보의 바다'쯤으로 묘사하면서 먼발치에 있었던 느낌이었다면 지금의 스마트폰은 수면이 목 끝까지 차오른 위기감을 느끼게 했다.
스팸메일로 가득 찬 머릿속을 비워야만 했다.
빈틈없이 들어찬 머릿속은 정작 스스로 생각이란 걸 할 틈 같은 건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 무렵 내가 글을 도저히 쓰지 못한 이유에 대해 자주 생각하게 되었고, 가장 먼저 한 일은 스마트폰을 멀리 던져버린 것이다.
물론 지금 당장 스마트폰이 우리의 시간을 얼마나 쉽게 도둑질하는지에 대해 깊이 논쟁할 생각은 없다. 이렇게 말하는 나조차도 필요한 정보를 가장 쉽게 얻는 통로를 꼽으라면 단연코 스마트폰이니까.
다른 이들의 생각을 읽어 들이는 일만 반복하다 보면 정작 주체적으로 뭔가를 만드는 행위(예를 들면 글쓰기)가 점점 어색해지고 어려워지는 걸 느낀다. 당장 핸드폰을 끄면 쓸만한 생각이 번뜩 떠오를 것 같았지만 딱히 그렇지도 않았다.
나는 샤워를 하러 화장실을 들어가면서도 핸드폰을 보면서 들어갔고, 온몸에 물을 적시기 직전까지도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해 옷을 훌렁 벗은 채로 핸드폰을 한참 들여다봤는데, 거울에 비친 그 모습이 썩 좋아 보이진 않았다. 그 볼품없는 모습에 1차로 충격을 받고 다음날 핸드폰 없이 욕실에 들어갔지만 샤워를 하는 와중에도 머릿속에는 아까 봤던 영상들을 곱씹거나 들었던 음악을 흥얼거렸다. 스마트폰을 저 멀리 던져버렸음에도 머릿속에는 자극적인 정보의 진한 잔상이 남아있었다. 스마트폰과의 연결은 무뎌진 칼로 밧줄을 자르는 것처럼 쉽게 끊어지지 않았다.
알코올 중독자가 강제로 술을 못 마시게 되면 술의 맛을 곱씹는 게 이런 느낌일까? 그래서 나는 원칙을 만들었다. 적어도 화장실에 갈 때와 식사를 할 때만큼은 스마트폰을 보지 않는 것으로. 하루 중 많은 비중을 차지하진 않았지만 그 시간만큼은 내 생각이라는 걸 할 수 있었다.
뭔가를 쓰고 싶다면 우선 하얀 도화지를 준비해야 한다. 도저히 깨끗한 도화지를 구할 길이 없다면 뭔가를 적을만한 자리 정도는 남아있는 이면지라도 필요하다. 글자로 범벅이 되어 까매진 종이 위에는 아무리 좋은 생각이나 구절도 적을 수가 없다. 스마트폰을 끄는 건 도화지를 준비하는 연습과도 같다.
이 글을 읽고 있을 누군가에게 지금 당장 스크린 타임을 극단적으로 줄여보라는 강요를 하고 싶진 않다. 대신 하루에 단 몇 분이라도 스마트폰 없이 온전히 생각만 할 수 있는 틈을 확보하고, 가능하다면 그 틈을 점차 늘려보길 바란다. 시간을 확보하는 게 어렵다면 화장실을 갈 때와 밥 먹을 때만이라도 핸드폰을 끄고, 자기만의 사적인 생각을 하는 연습을 하는 걸 추천한다.
앞에서 거창하게 생각할 틈을 만들어보라 했지만, 돌이켜 보면 막상 나도 특별한 생각을 많이 하진 않았던 것 같다. 어젯밤에 꿨던 이상한 꿈을 되짚어 보거나, 밥을 먹고 난 후엔 과일을 먹을지 말지, 어제 깜빡한 카톡 답장을 해야겠다든가 하는 아주 일상적인 의식의 흐름의 연속이었다. 그러다 간혹 '이거 글로 쓰면 재밌겠는데?' 싶은 생각이 떠오르면 핸드폰 메모장에 두다다다 적어내려 갔다.
비율로 따지자면 95%의 잡생각과 5%의 재밌는 생각쯤 되려나. 그렇다고 95%의 잡생각이 정말로 쓸모없었느냐라고 묻는다면 그건 또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생각이라는 미로에서 95%의 잡생각을 따라 헤매다 보면 간혹 5%의 재밌는 생각이라는 목적지에 도착하곤 했으니까.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선 헤매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한 법이다.
사람들 속에는 씨앗이 유영하듯 떠돌고 있어요. 기억이 생생히 나는 씨앗도 있고 내 안에 들어와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씨앗도 있어요. 그런 말이 있죠. "무의식은 모든 것을 기억한다."
우리의 거대한 무의식의 공간 안에도 온갖 씨앗이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언젠가 그 씨앗들이 어떤 자극으로 인해 부딪치거나 서로 교류를 일으키면 아이디어의 싹을 틔워낼 수도 있어요.
'당신과 나의 아이디어'의 김하나 작가는 크고 작은 아이디어들을 씨앗에 비유했다.
나 또한 생각을 하는 과정 자체가 씨앗들이 끊임없이 부딪치고 교류를 하는 과정이라는 의견에 격하게 공감하는 바이다. 단순히 정보를 받아들일 때와는 다르게 생각을 이어가다 보면 머릿속에서 크고 작은 스파크가 여기저기서 튀는 느낌을 자주 받는다.
핸드폰을 끄고 나에 대한 생각을 시작할 무렵, 무기력하고 우울한 마음을 블로그에 비공개로 일기를 썼다. 의욕적이다가도 불안하거나 좌절하는 내 감정을 가감 없이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어차피 아무도 안 볼 테니 앞 뒤 맥락도 맞지 않았고, 실컷 얘기하다 갑자기 딴 소리로 빠져버리는 글을 거침없이 썼다. 오로지 조금이라도 더 속에 있는 말을 많은 단어로 토해내는 것에 집중하는 연습을 계속한 셈이다. 지긋지긋한 수정도 건너뛰고 할 말 다 했다 싶으면 슝하고 업로드를 한 뒤엔 미련 없이 문을 쾅 닫아버렸다.
할 말 다해서 기분이 좀 홀가분해지면 메모장에 휘갈겨 놓은 5%의 재밌는 생각들 중 마음에 드는 걸 골라 조금씩 다듬기 시작했다. 글을 다듬고 꽤나 마음에 들었다면 마음에 든 대로, 마음에 들지 않다면 결말이 이상한 상태 그대로 글을 차별 없이 모았다.
그렇게 문 뒤에는 날것 그대로의 내 생각들이 하나씩 쌓여갔다. 내 생각들이 머리에 있으나 글로 쓰나 다를 건 없었지만, 어쨌거나 그 글들은 휘발되지 않고 다시 들여다볼 수 있다는 점에서 꽤 의미가 있었다. 시간이 날 때마다 한 번씩 그 글들을 다시 읽어보면 며칠 사이에 생각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바뀔 때가 있었고, 생각이 더 확장된 경우도 많았다. 그때마다 처음 썼던 글의 의도와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글을 쓰기도, 내 생각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할 표현들을 덧붙이곤 했다.
픽사의 창업자였던 애드 캣멀은 '성공은 초안과는 전혀 다른 버전으로 탄생하지만, 초안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라는 말을 남겼다. 글을 쓰는 것도 단 한 줄의 초안일지라도 초안이 있어야 한다. 시작점이 화려할 필요는 없지만 시작점이 있어야 출발을 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초안은 절대적으로 질보다 양으로 승부할 때 유리하다. 볼품없고, 횡설수설하고, 맥락도 맞지 않아서 누가 보면 "이게 글이야?" 싶은 초안들을 누구도 야유하지 않을 공간에서 마음껏 쌓아 올려야 한다.
그러다 거기서 유독 반짝거리는 초안의 먼지를 털어 조금씩 글을 쓰면 된다.
시작점만 찾는다면 출발은 그리 힘들지 않을 테니 말이다.
+짧은 근황
오랜만입니다. 마지막으로 쓴 글이 어느덧 2달 전이더라고요.
꾸준히 뭔가를 계속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한 것치곤 꽤나 괴리감이 느껴질 수밖에 없는 업로드 주기라 민망할 따름입니다. 아무래도 하던 일이 갑자기 바빠지고, 여러 일들이 겹치면서 진득하게 글을 쓸 여유가 없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이 글은 작가의 서랍 속 묵혀져 있던 원고 중 하나를 골라 다듬은 글입니다.
당시에 글을 쓸 때만 하더라도 내가 뭐라고 이런 조언 아닌 조언을 하나 싶어 서랍 깊숙한 곳에 넣어두고 잊고 있었던 글이었는데, 다시 읽어보니 지금의 저한테 말을 거는 것처럼 느껴지더라고요.
처음 슬럼프를 겪을 때는 꽤나 혼란스러웠지만 이제는 어떤 분야든 꾸준히 하는 사람들에게 슬럼프라는 건 주기마다 찾아오는 감기 같은 존재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감기를 이겨내고 나면 매번 더 좋은 쪽으로 발전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저 또한 변화가 있었습니다. 가장 눈에 띄는 건 캐릭터의 외형이 아주 살짝 바뀌었다 점이죠.
이전의 캐릭터가 대학생 시절의 모습이라면 지금의 캐릭터는 현재의 제 모습과 거의 흡사해져 버렸네요. 그림 속에서도 머리를 짧게 자르니 훨씬 시원해 보여서 진작 잘라줄 걸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좀 더 쉽게, 좀 더 단순하게 표현하는 방법을 찾아 더 많은 컨텐츠를 남기는 걸 목표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려합니다. 언제나 제 이야기를 들어주시는 모든 독자분들께 항상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