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란 읽을수록 품 안에 파고드는가 보다. 건축가 승효상의 <묵상>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실감한 사실이다. 처음 읽을 때 놓쳤던 문장과 사진들이 술래에게 들킨 아이처럼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묵상>은 건축가 승효상과 동숭학당 일행의 여정을 담고 있는 에세이다. 저자 승효상은 유럽의 수도원을 순례하면서 얻은 사유를 수려한 문체로 펼쳐 보이고 있다. 책 표지의 검은색 톤은 고급스럽고 수록된 흑백사진은 작품처럼 격조가 있다. 인간의 삶과 공간에 대하여 깊게 생각할 수 있는 책이었다.
공간은 인간의 숨결이 닿을 때라야 살아 움직인다.. 햇살 고운 공원과 정겨운 단골 식당. 그리고 카페와 대학 캠퍼스 등은 삶의 흔적이 묻어있는 소중한 공간들이다. 그 안에 서려있는 삶이 시간 속에풍화되면 박제된 추억만 남게 된다. 하지만 그 추억은 우리의 상실감을 달래주고 생의 감각을 새롭게 해 준다.
이모 손에 자라며 지독한 사춘기를 보냈던 존 레넌은 <In my life>에서 추억 속 공간과 사람들을 노래했다.
“일생 동안 내가 기억하는 그런 곳들이 있어요. 어떤 곳은 다소 변하기도 했고, 변하지 않고 영원토록 그대로 있기도 하고, 어떤 장소는 사라졌기도 하고 아직 남아 있기도 해요. 이런 모든 곳은 내가 아직도 기억할 수 있는 연인과 친구들의 추억이 서린 순간들을 품고 있어요.”
프로듀서 조지마틴이 연주한하프시코드 풍의 피아노 선율이 돋보이는 <In my life>는 1965년 비틀스의 <Rubber Soul> 앨범에 수록되어 있다. 비틀스의 나라 영국에서는 <Yesterday>만큼이나 사랑받고 있는 곡이다.추억이 담긴 공간과 그곳에 살고 있는 이들을 노래한 <In my life>. 살아가는 모든 이라면 자신만의 ‘In my life’가 있을 것이다.
<In my life>가 노래하는 공간은 고대사회 소도(蘇塗)처럼 숨을 쉬게 한다. 소도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성역이자, 죄인마저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신성한 공간이다. 하늘을 우러르며 생명을 살렸던 소도는 우리에게 필요한 안식처이다. 내게도 그런 소도, ‘In my life’가 있으니, 그곳은 강과 산이 펼쳐진 19번 국도다.
남해 고속도로를 달리던 차가 석곡나들목에서 빠지면 광양까지 이어지는 19번 국도를 만날 수 있다. 섬진강 지류인 보성강을 끼고 압록에 이를 때면 손짓하는 푸르른 섬진강과 지리산이 보일 것이다. 좌는 지리산요, 우는 섬진강이라. 눈부시게 아름다운 남도 길. 내 삶의 소도요, 산소호흡기다.
버스만 타고 다녔던 때. 하루는 아버지 심부름으로 19번 국도로 다니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보성강을 옆에 두고 달려가는 차 창밖으로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았다. 강물에 반사된 햇살과 피어나는 물안개가 뒤섞여 오묘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멀리 있던 지리산도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이런 걸 두고 명산명수라 하던가. 그제야 차가 없는 신세가 아쉬웠다.
압록은 19번 국도의 발목이다. 대학 시절 친구들과 투망을 던지며 종일 놀았던 곳이다. 그때 투망 안에는 작은 물고기가 몇 마리만 들어있었다. 피라미인지 은어인지 구분마저 안될 정도였다. 그 작고 불쌍한 물고기를 고추장과 된장과 함께 냄비에 집어넣었다. 결과는? 매운맛만 올라오는 정체 모를 요리였다. 물론 애매한 맛은 소주로 씻어냈다. 그 후로 압록에 서면 “나 다시 돌아갈래”라고 소리치고 싶어졌다.
결혼 전 아내와 19번 국도를 따라서 답사를 했었다. 불교대학에서 주최한 행사였다. 화엄사와 천은사를 거쳐 늦은 오후에 연곡사 들렸다. 아내는 이런 분야에 관심이 없다. 지금 같으면 적극 사양하겠지만 그때는 순한 양처럼 따랐다. 그 시절이 좋았다.
아이들을 데리고 여름철이며 19번 국도를 달려와 지리산과 섬진강에서 휴가를 보냈다. 어느 해 여름, 아내는 정성껏 도시락을 마련했고 아이들이 한껏 들떠있었다. 섬진강이 잘 보이는 전망터에 도착했다. 점심을 먹기 위해서 자리를 깔았는데 정작 도시락 행방이 묘연했다. 집에 두고 온 것이었다. 그날 우리 가족은 옥수수 떡과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웠다.그래도 즐거웠다.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로지르는 섬지강 줄기 따라 화개장터엔 ♪”흥겨운 노래가 울리는 화개장터는 그 옛날 장터 분위기가 묻어있다. 눈과 귀 그리고 입에 흥이 넘쳐나는 공간이다. 어머니를 모시고 이곳에서 먹었던 참게탕과 메기탕. 어머니는 어린 시절이 생각난다면 한동안 장터를 맴돌았다. 가히, 화개장터는 꽃피는 19번 국도의 화룡점정이다.
길의 마무리는 하동군 악양 평사리 공원이다. 악양은 부처님의 정토 세계의 별칭이다. 그곳 백사장을 걸어서 강물에 발을 담그면 섬진강이 조용히 말을 걸어온다. 해가 떨어질 때면 붉은 노을과 푸른 실루엣이 강물 위로 내려온다.
한 마리 연어처럼 19번 국도를 벗어나 집으로 향할 때면 가로등이 켜진다. 섬진강과 지리산도 희미해진다. 대신 코발트 빛 어둠이 그 공간 속으로 스며들고 있다. 비틀스의 <In my life> 음악에 장단을 맞추며 어둠을 헤쳐간다. 가히 아름다운 my life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