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은 수려한 첫 문장으로 유명하다. 그 문장은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로 시작된다. <설국>은 내가 처음 만났던 일본 문학이었다. 훗날 ‘나쓰메 소세키’라든지 ‘오엔 겐자부로’와 같은 이들의 명성은 들었지만, 일본 문학은 멀게만 느껴졌다.
<설국>을 읽었던 이유는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품이라는 호기심 때문이었다. 그래서일까? 강렬한 첫 문장을 빼고 나면, 나머지 내용은 흐릿했다. 나의 일본 문학에 대한 냉랭함은 ‘무리카미 하루키’가 초신성처럼 등장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소설 <상실의 시대>가 대박이 났고, 하루키 신드롬이 문학계에 일어났지만 내게는 별 감흥이 없었다.
무라카미 하루키를 향한 환호는 요란스러웠다. 하루키가 발표하는 작품은 늘 화제였지만, 일시적인 거품일 거라며 그의 작품을 애써 외면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를 향한 찬사가 높아질수록,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있으랴’는 꼬인 감정이 있었던 것 같다.
어느 해였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는 풍문을 들었다. 나는 그제야 ‘하루키의 책을 읽어야 하나’라는 생각을 했다. 며칠 후, 도서관에서 그의 대표작인 <상실의 시대>를 대출해 읽게 되었다. 결과는? 역시 선입견은 무서웠다. 그의 작품은 안개가 자욱한 미로와 같았다.
예상보다 문체는 평이했고(물론 번역의 문제일 수 있다) 스토리는 난해했다. 단지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만은 독특했다. 아무튼 카타르시스는커녕 나의 무뎌진 감수성만 실감할 뿐이었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 열광하는 이들에게 묻고 싶어졌다. “도대체 왜 그렇게 하루키를 좋아하세요?”라고.
그 후로 하루키 문학은 나와는 인연이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높은 명성과 작품의 수준이 반드시 비례는 아니라면서 하루키 독파에 실패한 나의 문해력을 위로했다. 그 후로도 <스프트니크의 연인>, <IQ 84>, <색채가 없는 다자쿠 쓰쿠루와 그의 순례를 떠난 해> 등 그의 작품은 발표될 때마다 베스트셀러를 기록하였다. 하지만 나는 서점에 쌓여있는 그의 책을 무심히 바라볼 뿐이었다.
그나마 <상실의 시대>에서 공감이 되었던 부분은 하루키의 음악 세계였다. 비틀스의 <노르웨이 숲>란 곡도 이때 알았다. 비록 작품의 감흥은 냉랭했지만, 내용에 등장하는 음악들은 그 제목만으로도 반가웠다. 하루키의 음악적 감각과 박식함은 재즈와 바흐의 <무반주첼로곡> 그리고 비틀스의 <미셀> 등 장르 구분 없이 작품 안에서 빛나고 있었다.
올봄, 집 근처 대학가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를 읽는 인문학 모임’이라는 안내문을 보게 되었다. 안내의 글을 유심히 보다가 하루키 작품에 다시 한번 도전하기로 결심했다. 그날 저녁, 단톡방에 ‘하루키 작품을 읽어보렵니다’라는 글을 올렸다. 이윽고 ‘뭣 하게?’와 ‘아직도?’라는 댓글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우선 하루키의 작품 가운데서 <상실의 시대>, <해변의 카프카>, <스푸트니크의 연인>을 읽어 보았다. 소감을 간단히 말해보련다. 먼저 <스푸트니크의 연인>는 두 세계가 교차되는 몽환적 분위기와 동성애 코드가 독특했다. <해변의 카프카>는 괴상한 작품이었다. 고양이 살인, 입구의 돌, 15세와 50대의 사이키 사이를 오가는 가출 청소년 다무라 카프카 등 참으로 난감한 줄거리 전개였다.
다시 만난 <상실의 시대>을 읽으면서, 나의 문학적 촉각을 복구하고자 애를 썼다. 사실, 17세 와타나베와 나오코, 미도리의 감성을 헤아리기란 쉽지 않았다. 적당한 속물이 된 30세의 와타나베가 17세 시절을 회고하듯, 나의 청춘이 떠올랐다. 그리고 내게도 '상실의 시대'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렇게 하루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를 만난 것일까?
<상실의 시대>의 여운을 음미하면서, 비틀스의 <노르웨이 숲>을 들어본다. 이 음악의 부제는 상실의 뜻하는 ‘This Bird Has Flown(그 새는 날아가버리고)’이다. 오늘날 이 곡은 사이키델릭 음악의 뿌리로 평가를 받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비틀스의 <노르웨이 숲>의 제목이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의 원제목이라고 알려져 유명해졌다. 천하의 비틀스가 하루키의 덕을 본 셈인 것이다.
비틀스의 <노르웨이 숲>은 1965년 앨범 <Rubber soul>에 수록되었다. 노래 속에는 인도의 시타르의 울림이 아련히 들려온다. 이 곡은 인도에 매료되었던 조지 해리슨이 시타르의 장인 ‘라비상카’에게 연주법을 배워서 선보였다. ‘라비상카’은 <Don’t know why>를 부른 팝 스타 '노라 존스'의 아버지라고 한다. 그녀의 밤안개 같은 끈끈한 호소력의 뿌리를 알겠다.
<Norwegian Wood>의 제목을 ‘노르웨이 숲’이 아닌 ‘노르웨이 가구’로 읽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일리 있는 해석이다. 하지만 비록 규범에 맞더라도, 따르기 싫은 경우도 있지 않겠는가? 예를 들자면 자장면이 옳더라도 왠지 짜장면에 더 끌리는 것처럼 말이다. 비록 오역일망정 ‘가구’보다는 ‘숲’이란 번역이 주는 미적 분위기에 끌린다.
모든 것은 변해가는 법이다. 이른바 ‘제행무상’, 예외 없는 우주의 법칙이다. 그래서 <상실의 시대>를 읽고 나서 허무와 상실에 가슴이 시렸나 보다. 그리고 나 또한 그 시절에 상실이란 성장통을 겪었음을 깨닫는다. 표지에 실려있는 하루키의 사진에게 이렇게 물어본다. "하루키 씨, 당신 작품을 이해한 것 맞나요?"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