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벗은 내 몸이 / 뒤 안에서 떠는 것은 / 사랑과 미움과 배움의 참을 / 너로부터 가르쳐 / 받지 못한 탓이나 / 하여 나는 바람 부는 처음을 알고파서 두리번거린다
말없이 찾아온 친구 곁에서 / 교정 뒤 안의 황무지에서 / 무너진 내 몸이 눌리어 / 우는 것은 / 눈물과 땀과 싸움의 참이 / 너로부터 가리어 / 알지 못한 탓이나
하여 나는 바람 부는 처음을 알고파서 두리번거린다 / 말없이 찾아온 친구 곁에서 / 교정 뒤 안의 황무지에서
k-팝 아이돌의 노래는 난감하다. 대체 무슨 말인지, 어떤 의미인지 알 수가 없으니 말이다. 더욱이 노래 가사가 한국어인지 영어인지 아니면 방언이 터진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율동과 군무는 과하고 멜로디와 리듬은 산란하다.
오늘처럼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내릴 때면 턱 받치고 노랫말을 음미할 수 있는 음악이 그리워진다. CD 상자에서 김광석과 김민기 앨범을 꺼내 본다. 결국 선택은 김민기다. 플레이어에 CD를 집어넣는다. <두리번거린다>가 흘러나온다. 그렇지 바로 이거지. 가사의 은유와 심리 묘사가 시처럼 반짝거린다. 느리고 낮은 목소리에 실린 “헐벗은 내 몸이~”로 시작되는 노랫말이 기타 선율에 실려서 허공에 퍼져간다.
어느 대중음악 비평가 말했다. 신중현이 대중가요의 형식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면, 김민기는 가요의 내면세계를 한 단계 끌어올렸다고. 사랑, 이별, 어머니, 고향 등 감성의 가사들이 판치던 그 시절, 바람, 불빛, 황무지, 바다, 길, 아름다운 등과 같은 사유의 노랫말을 선보인 이가 김민기다. 그렇게 그는 넋두리에서 벗어난 아름다운 우리말로 고운 노래들을 들려주었다.
김민기 작사, 작곡의 <두리번거린다>는 1983년 서라벌레코드에서 발매된 양희은의 신곡앨범에 수록되어 있다. 그녀의 인기곡 <하얀 목련>이 담겨있는 『양희은 신곡집』에서 김민기의 <두리번거린다>는 양희은 작사, 작곡으로 적혀있다. 뿐만 아니라, <천리길>, <주여, 이제는 그곳에> 같은 김민기의 작품도 양희은의 이름으로 되어있다.
정의 사회를 구현하겠다는 전두환 정권 시절, 김민기는 익명의 존재였다. 그 시절 그는 농부로, 때로는 보령에서 광부로 지내면서 근근이 세상을 견디고 있었다. 젊은 날의 고뇌가 그려진 <두리번거린다>는 1993년에야 서울음반이 시리즈로 발매한 <김민기 1>에서 비로소 자신의 이름으로 노래할 수 있었다. 바야흐로 문민정부의 시절이었다.
<두리번거린다>의 화자는 방황하는 대학생이다. 바람만이 이는 황량한 교정에서 막막해하는 청춘의 고뇌가 마치 나의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돌이켜보니, 이십 대는 안개와 같은 날의 연속이었다. 갈 길은 먼데, 딱히 걸음을 내디딜 방향은 안 보였다. 메마른 훈수를 두는 어른들은 많지만 정작 방법과 길을 알려주는 이는 없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식의 허무한 충고만 들리던 시절. 친구와 선배를 찾아다니며 삶의 방향을 물어보아도, 헤매는 것은 그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젊은 날은 축복의 계절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비록 어설픔과 불안, 넘치는 에너지로 뒤범벅이지만 맑은 시절이었다. 가끔 졸업한 제자들을 만날 때면 그들에게서 삶의 무거움과 고뇌가 보게 된다. 세상에 자신의 자리를 찾고자 애쓰는 제자에게 어깨를 툭 치면서 ‘괜찮다’라며 격려하고 싶지만,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섣부른 위로와 허무한 격려가 또 다른 상처가 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세상을 두리번거리는 이들의 마음은 곱다. 자기중심에서 벗어나 주위를 둘러볼 줄 아는 그 마음에 눈이 간다. 반면에 가끔 좌고우면(左顧右眄) 하지 말고, 하나가 되어 달려가자는 이들이 볼 때가 있다. 이들의 말은 사나워서 ‘목에 칼이 들어와도~’ 라거나 ‘눈에 흙은 들어가도~’라는 말을 즐기는 부류다. 이들은 뭉쳐야 하고, 완벽해야 하며, 과감해야 한다고 설교한다. 이른바 패거리다.
좌고우면 없는 각자도생의 시대를 목격하고 있다. 무례하고 무식하고 폭력적인 음성이 매일 들려온다. 두리번거리는 이들은 용서할 수 없다며 자기를 따라서 달려가잖다. 그 요설에 귀가 아프다. 두리번거리면 패배, 양보와 균형도 패배라며 윽박지르니 이를 어쩌라. 이들은 알고 있을까? 두리번거리는 이가 세상을 지켜낸다는 사실을. 그들이 말하는 ‘자유’와 '정의'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 '껍데기는 가라'던 신동엽 시가 떠오른다.
이순(耳順)의 길목에서 이마에 손을 얹고 주위를 두리번거려 본다. 가야 할 길이 막연하고 뿌옇지만, 어차피 그 길이 걸어야 할 길이다. 그러니 호흡을 늦추고 생각해 본다. 갈팡질팡할지라도 두리번거리면서 지상의 나그네로 살아가야 한다. 그럴 때 <두리번거린다>와 같은 음악은 위로가 될 것이다. “하여 나는 바람 부는 처음을 알고파서 두리번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