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장의 불빛

김민기 다시 듣기 7

by 박신호

예쁘게 빛나던 불빛, 공장의 불빛

온 데 간데도 없고 희뿌연 작업등만

남녀모두 이대로 못 돌아가지,

그리운 고향 마을

춥고 지친 밤 여기는 또 다른 고향

여기는 또 다른 고향

그리운 고향 마을

춥고 지친 밤 여기는 또 다른 고향

여기는 또 다른 고향


뮤지컬 <맘마미아> 공연 홍보 현수막이 거리에 나부끼고 있다. 음... '맘마미아'라~, 비록 아바의 열렬 팬이지만 십만 원이 훌쩍 넘는 관람비를 지불할 의사는 없다. 게다가 이미 동명의 영화까지 보았으니 말이다. 물론 무대를 직접 만나는 은 색다른 경험이겠지만, 오감 만족을 위한 과도한 씀씀이는 아닌 것 같다.


대학 시절, <산불>, <카덴자>와 같은 대학 동아리의 연극 무대를 심심치 않게 보곤 했다. 관람 후, 벗들과 기울었던 술자리의 추억도 아련하다. 당시 캠퍼스에는 노래굿이나 마당극 공연을 쉽게 만날 수 있었는데, 이는 일종의 독재 항거의 방편이자, 우리 문화에 대한 재인식이었다.


김민기의 <공장의 불빛>은 노래굿의 전설이며, 한 시대의 문화적 분수령으로 평가받는다. <공장의 불빛>은 1978년은 유신독재의 종말기에 만들어졌다. 어둠이 짙을수록 탄압은 독한 법이니, 당시 동일방직 노조 탄압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공장의 불빛>은 한국선교사업회의 후원 형식으로 김민기의 기획력과 몇몇 벗의 헌신으로 제작되었다. 총 19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물, 흑인영가. 트롯, 남도소리 등 다양한 음악적 양식이 극적 내용으로 녹아있다. <공장의 불빛>은 넓은 의미에서 현대판 마당굿이다. 그 시절 마당굿은 풍물패와 더불어 청춘의 문화로 자리하고 있었다. 물론 김지하, 채희완, 황석영 등과 같은 놀이꾼들 노고도 있었지만, 김민기의 새로운 시도는 마당극의 현대적 해석이라는 물길을 내었다.

1977년 파란만장했던 군생활을 마무리한 김민기는 그해 부평에 있는 한 봉제공장에 취업을 했다. 이때의 경험이 <공장의 불빛> 안에 녹아 있다. <공장의 불빛> 제작 상황에 대한 증언은 조금씩 다르다. 노동 탄압에 대한 내용인 만큼 <공장의 불빛> 녹음은 정권과의 충돌을 각오한 작업이었다. 내가 아는 바로는 송창식 개인 녹음실에서 비밀리 녹음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공장의 불빛>은 가수 송창식에 대한 경외심이 들게 한다. 구성진 음색이 절창인 송창식은 작가 최인호 등과 더불어 70년대 젊은이의 상징이었다. <왜 불러>와 <한 번쯤>, <고래사냥> 등 인기곡에 힘입은 송창식은 MBC 10대 가요제에서 가수왕까지 뽑혔던 스타였다. 그러던어느날 김민기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게 .

송창식과 김민기는 세시봉 시절부터 알고 지냈던 사이라고 한다. 김민기는 송창식에게 <공장의 불빛>에 참여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 김민기는 진작부터 독재 정권에게 미운털이 박힌 인물이었지만, 송창식의 입장에서는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는 치명적인 제안이었다. 유신 독재 시절, 반정부 활동으로 적발되면 남산 정보부에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당하기 마련이었으니 말이다.

놀라운 사실은 이러한 부담에도 불구하고 송창식은 김민기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렇게 송창식은 김민기와 함께 자신의 녹음실에서 인생을 건 작업을 했다. 과연 내가 송창식의 처지라면 김민기의 부탁을 수락했을까? 글쎄... 부담된다면서 거절했을 것 같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간혹 세시봉의 이름으로 TV에 얼굴을 비추는 송창식 옹을 볼 때면 존경심이 일곤 한다.

김민기는 비밀리 작업한 <공장의 불빛>을 카세트테이프에 담았다. 이 카세트테이프는 복사를 거듭하면서 노동 현장으로 퍼져갔다. 이후 김민기는 정보부의 검거를 피해 다녔는데, 하루는 광주에 몰래 내려왔다고 한다. 그날 어둠이 깔린 늦은 밤, 광천동 성당 앞 골목길을 지나던 김민기는 깜짝 놀란다. 성당의 한 건물에서 나오는 <공장의 불빛>을 들었던 것이다. 이렇게 <공장의 불빛>은 은밀하게 퍼지고 있었다.

결국 김민기는 남산 정보부에 연행되었지만 훈방 조치로 나오게 되었다. 중앙정보부의 이러한 처리는 뜻밖이었고, 이듬해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궁정동에서 피살되었다. 마침내 유신의 심장이 쓰러진 것이었다. 유신의 종말을 지켜본 김민기는 전북 김제에서 소작농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보령에서의 광부와 민통선에서 농사를 짓다가 뜻밖의 화재로 1983년에 서울로 올라온다. 그 무렵 세상은 정의 사회를 구현하겠다는 전두환 천하였다.


김민기는 극단 학전에서 1000회에 걸쳐 공연을 했었던 김광석이 사망하자, 그를 추모하는 <김광석 다시 부르기>와 독일의 폴커 루드비히의 원작인 뮤지컬 <지하철 1호선>으로 대박을 터뜨렸. 특히 <지하철 1호선>는 2008년까지 4천 회 공연을 했으며 매표 수입만 100억 원을 넘겼다고 한다. 이러한 공연 기획의 시초가 <공장의 불빛>이었다.

김민기은 2008년에 잘 나가던 <지하철 1호선>을 끝내기로 한다. 그 이유는 뜻밖이었으니, 김민기는 너무 돈을 버는 것이 무서웠다고 했다. 그전에도 같은 이유로 <김광석 다시 부르기> 공연을 중단했던 그였다. 그 후 김민기는 아동, 청소년극인 <개똥이>, <우리는 삼총사> 등과 작품을 무대에 올리고 있다. 덕분에 극단 학전은 늘 돈에 쩔쩔매고 있다고 한다. 김민기는 자본과 조용한 투쟁을 겨루는 수줍은 전사(戰士)였다.


김민기에게는 수도승과 같은 분위기가 있다고 그를 만난 이들은 말한다. 그의 무거운 침묵, 수줍은 미소. 이제 1951년생 김민기는 칠순을 훌쩍 넘었다. 과연 그에게 A석 15만 원이라는 유명 뮤지컬을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는다면, 아마도 빙그레 웃을 뿐 말이 없을 것이다.


오늘도 김민기는 극단 사무실에 앉아서 갚아야 할 채무를 고심하면서, 또 다른 돈이 안될 공연을 꿈꾸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와 동시대를 보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무궁한 영광이다. 그의 순결한 정신을 생각할때면 잘 산다는 것의 의미를 헤아려 보게 된다. 그리고 그때마다 부끄러워진다.


(공장의 불빛 제작과정에 대한 것은 오래전 방송에서 보았던 내용이므로 사실과 다를 수 있다. 언젠가 김민기 아저씨를 만난다면 정확하게 여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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