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뉴스를 볼때마다 마음이 편치않다.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참상 때문이다. 먼 나라 일이라고 모른 척하기엔 저들의 처지가 너무 참혹하다.화면에는 눈이 커다란 어린 소녀의 눈물과 내려앉은 건물에 깔려 있는 자녀의 이름을 외치며 오열하는 아버지. 저것은 전쟁이 아니라 학살이다.
내가 빵과 요플레로 아침 식사를 하는 순간에도 가자 지구에서는 포화가 치솟고 구급차가 달려갈 것이다.하루의 생명을 기약할 수 있는 그들의 삶. 언제 날아올지 모르는 이스라엘의 살상 무기앞에 하루의 목숨을 연망 하기란 신의 영역이다.
이스라엘은 하마스의 공격 때문이라고 항변하지만 인과를 따져보자면 끝이 없다. 가자 지구 봉쇄를 위해 세웠던 8미터의 콘크리트 장벽이 무엇을 말하는가. 그곳은 거대한 감옥이자 가혹한 통제의 끝판이다. 피에 젖어 축 늘어진 아들의 시신을 안고 알라신께 복수를 다짐하는 팔레스타인 땅은 아수라의 세계다. 이럴 때마다 ‘주여, 당신은 어디에’라는 오래된 물음을 던지게 된다.
유신 철권통치가 절정으로 달릴 무렵 김민기는 <주여, 이제는 여기에>를 작곡했다. 작사는 김지하 시인이다. 이 노래는 김지하가 기획한 연극 <금관의 예수>의 도입부에 나온다. 곡은 비장하고 무겁게 시작한다. 느린 키보드 음향이 깔리면 김민기의 낮은 목소리가 실려 온다. 이어서 어린아이들이 ‘주여, 이제는 여기에’ 후렴구를 노래한다.
<주여, 이제는 여기에>는 가스펠로 착각하기 쉬운 곡명이다. 노랫말은 종교적이지만 그 이면은 고단한 인간 삶에 대한 내용이다. 이 무렵 김민기와 김지하는 독재 정권으로부터 감시받거나 쫓기는 살얼음 같은 나날이었다. 그런 이유 때문일까?선율과 노랫말 모두가 레쿼엄처럼 비장하다.
이 곡은 1978년 양희은 앨범에 수록된다. 한데이때의곡명이 <오, 주여 이제는 그곳에>으로 달라져 있다. ‘이곳’ 대신에 ‘그곳에’으로 바뀐 것이다. 여기서 그곳이란 북한이라고 설명한다. 민망한 견강부회이자, 사전심의 통과를 위한 고육지책(苦肉之策)이었다. 훗날 ‘그곳’이란 단어는 다시 ‘이곳’으로 변경하게 된다. 한국 대중음악의 암흑기였다.
<주여, 이제는 여기에>는 기독교 민중가요의 효시이다. 원주 가톨릭 회관에서 김지하의 희곡 <금관의 예수> 공연이 있었다. 이때 곡을 김지하에게 부탁받은 김민기는 원주로 가는 시외버스 안에서 작곡했다. 당시 원주는 천주교 중심의 반독재투쟁의 본영이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공연을 주선자가 90년대 주사파 논쟁을 일으킨 박홍 신부라고 한다.훗날 김지하와 박홍은 닮은꼴 행로를 걷게 되니, 인간이란 알 수 없는 존재다.
아무튼 이 무렵 김민기는 김지하를 따르면서 연극과 희곡에 대하여 배웠다. 그는<금관의 예수> 공연에서 얻은 경험으로 현대판 노동요 <공장의 불빛>과 국내 최장기 공연 기록 타이틀의 <지하철 1호선>이라는 희대의 공연물을 만들였다.
<주여, 이제는 여기에>와 겹치는 시가 있다. “예수가 낚싯대를 드리우고 한강에 앉아 있다.”로 시작되는 정호승 시인의「서울 예수」란 작품이다. 천상의 천사들과 있는 예수가 아닌 노동자와 병자, 죄인들과 함께하는 예수를 노래한 시다. 내 학창 시절의 개신교는 진보였고 인권의 최전선에 있었다. 요즘 광화문에서 태극기 집회를 주도하는 극우 성향의 개신교 집회를 보노라면 씁쓸해진다.
내가 천주교에서 세례를 받았던 80년대 후반만 해도 해방신학, 밥상공동체, 민중신학과 같은 용어를 쉽게 들을 수 있었다. 소외되고 쫓긴 자들이 제일 먼저 달려가던 곳도 명동성당이었다. 반면에 오늘날 우리 사회의 종교계는 보수화와 자본화에 젖어있다. 청년들은 사라져 가고 성직 지망생들도 부족하단다. 물신이 점령한 예배당은그들만의 천국일 뿐. 거기에 예수가 있겠는가.
혹시 꿈에 예수님을 만난다면 이렇게 아뢸 것이다. 어서 빨리 당신이 태어났다는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가시라고. 거기 부서진 건물 더미에 웅크리고 있을 그들 곁에 있어 달라고. 오늘 밤, 손을 모으고 “기리에 엘레이손,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 구원송을 낮은 소리로 되뇌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