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길

김민기 다시 듣기 11

by 박신호

동산에 아침 햇살 구름 뚫고 솟아와

새하얀 접시꽃잎 위에 눈부시게 빛나고

발아래는 구름바다 천 길을 뻗었나

산 아래 마을들아 밤새 잘들 잤느냐

나뭇잎이 스쳐가네 물방울이 날으네

발목에 엉킨 칡넝쿨 우리 갈 길 막아도

노루 사슴 뛰어간다 머리 위엔 종달새

수풀 저편 논두렁엔 아기 염소가 노닌다

가자 천리길 굽이굽이 쳐 가자

흙먼지 모두 마시면서 내 땅에 내가 간다

쏟아지는 불햇살 몰아치는 흙먼지

이마에 맺힌 땀방울 눈가에 쓰려도

우물가에 새색시 물동이이고 오네

호랑나비 날으고 아이들은 촐랑거린다

먹구름이 몰려온다 빗방울도 떨어진다

등 뒤로 흘러내린 물이 속옷까지 적셔도

소나기를 피하랴 천둥인들 무서우랴

겁쟁이 강아지는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가자 천리길 굽이굽이 쳐 가자

흙먼지 모두 마시면서 내 땅에 내가 간다

출렁이는 밤하늘 구름엔 달 가고

귓가에 시냇물 소리 소골소골 얘기하네

졸지 말고 깨어라 쉬지 말고 흘러라

새아침이 올 때까지 어두운 이밤을 지켜라

가자 천리길 굽이굽이 쳐 가자

흙먼지 모두 마시면서 내 땅에 내가 간다

랄라랄라


아내는 트로트 가수 정동원의 팬이다. 과거 정동원이 트로트 방송 나올 때부터 어린것이 짠하다며 응원을 했었다. 하지만 인기몰이를 하던 어린 정동원을 볼 때면 은근히 그의 앞날이 염려되곤 했다. 너무 일찍 팬들의 사랑을 받았던 십 대 스타들의 몰락과 후유증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근래 방송에서 간혹 어린 학생들이 ‘사랑, 서러움, 이별’ 따위의 트로트를 부르는 경우를 볼 수 있다. 때로는 인기 아이돌의 요염한 몸짓을 따라 하면서 “아파 맘이 네가 걔 못 잊을 때 내 말 믿어~”라고 외치는 어린 목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성장촉진제를 맞은듯한 저 어린 영혼의 몸짓들. 낭만에 이어 동심마저 사라진 세상. 문득 씁쓸해진다.

k-아이돌에게 어린이를 빼앗긴 위기의 동요를 지켜는 이들이 있다. 시인 겸 작곡가 백창우와 어린이 노래패 ‘굴렁쇠아이들’가 그들이다. 이들이 발표한 창작동요 앨범은 십 여장에 이른다. 백창우는 <내 하나의 사랑은 가고>라는 인기곡을 만들었음에도 인기 작곡가의 길보다는 동요 작업에 마음을 쏟고 있다. 그는 몇 해 전 아침이슬 50주년 기념으로 나온 동요집 <김민기, 어린이를 담다>의 프로듀서를 담당했었다.


<김민기, 어린이를 담다> 음반은 백창우 외에도 노찾사 멤버였던 조경옥, 평화노래꾼 홍순관, 굴렁쇠 아이들이 참여한 수정 같은 앨범이다. 김민기의 곡들 가운데 <작은 연못>, <식구 생각>, <백구>, <고무줄놀이> 등은 동요풍의 곡들이 수록되어 있다. 김민기의 동심을 향한 시선은 극단 학전의 공연프로그램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개똥이>, <우리는 친구다>, <무적의 삼총사>, <진구는 게임 중> 등. 언제가 그는 돈이 안 되는 아동극에 빠졌노라고 했다. 하긴 김민기는 늘 돈이 안 되는 길을 걸었던 조용한 반자본주의자였다.

<김민기, 어린이를 담다>에는 <천리길>이 들어있다. 이 곡은 서울의 봄이라 일컬은 1979년 어수선한 시절에 만들어졌다. 그즈음 양희은 앨범에 <상록수>와 함께 수록되었지만 크게 알려지지는 않았다. 이 노래가 유명해진 계기는 SK 휘발유 광고음악으로 사용되면서부터였다. 김민기가 <천리길>를 직접 부른 것은 1994년 <김민기 전집 4>이다. 이 음반에는 김민기 외 이지현, 윤주현, 김두현 어린이가 <천리길>를 힘차게 노래하고 있다.

<천리길>은 몸에 착착 감기는 휘파람 소리로부터 시작된다. 이어서 어린이의 티 없는 음성으로 여름날의 정경을 노래한다. 가히 ‘아침에 동산 햇살, 꽃, 나뭇잎, 노루, 종달새, 사슴’ 등 목가적 분위기다. 하지만 곧이어 ‘발목을 잡는 칡덩굴, 불타는 뜨거움, 밀려오는 먹구름과 빗방울’과 같은 무거운 분위기로 바꿔간다. 쓰러진 유신의 심장 대신 등장하는 신군부를 향한 우려의 메타포일까?


여기서부터 김민기의 목소리는 깊어진다. “졸지 말고 깨어라, 쉬지 말고 흘러라”라고. 마침내 <천리길>의 끝은 장엄하니 노랫말을 유심히 읽어보자. “가자, 천리길 굽이굽이 쳐가자. 흙먼지 마시면서 내 땅에 내가 간다.” 불길한 서울의 봄, 혼란에 긴장하고 있는 세상을 향한 김민기의 내재율은 아니었을까.


예로부터 시대를 암시했던 참요(讖謠)는 어린이들의 목소리로 퍼지곤 했다. 알려진 <서동요> 외에도 고려 건국을 예언한 <계림요>, 이성계의 등장을 암시하는 <목자요>, 인현왕후와 장희빈을 풍자한 <미나리요> 등. 아마도 어린이들이 저잣거리에서 불렸을 가능성이 크다. 사실 김민기는 정치적인 인물로 늘 감시를 받아왔지만 정작 그는 현안에 대하여 어떤 견해도 공개적으로 드러냈던 적이 없다. 그저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고운 선율로써 뜻을 암시할 뿐이었다.

에너지 넘치는 <천리길>을 젊은 벗들이 자주 들었으면 좋겠다. 요즈음의 MZ세대들의 어려운 처지는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어느 시대나 청춘은 힘들었고 주어진 사명은 무거웠다. 일제 강점기에도, 독재 시절에도 청춘은 고단했고 거대한 장벽에 좌절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다시 일어나 세상의 물꼬를 뚫었던 것은 청춘들의 패기였다.


부디 움츠리지 말고 스스로 갇히지 말고, 옆에 있는 벗들과 어깨동무하면서 어려운 시절을 건너가길 바란다. ‘아프니깐 청춘이다’와 같은 힘 빼는 말 대신에 내면에 잠든 패기부터 깨워보자. 그 젊은 힘으로 시대의 발목을 잡는 칡덩굴과 흙먼지를 걷어내자. 가끔 힘에 부칠 때면 잠시 멈춰서 <천리길>를 들어보면 된다. 그 푸르른 응원가를.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