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 구

김민기 다시 듣기 9

by 박신호

검푸른 바닷가에 비가 내리면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물이오?

그 깊은 바닷속에 고요히 잠기면

무엇이 산 것이고 무엇이 죽었소?

눈앞에 떠오는 친구의 모습

흩날리는 꽃잎 위에 어른거리오

저 멀리 들리는 친구의 음성

달리는 기차 바퀴가 대답하려나

눈앞에 보이는 수많은 모습들

그 모두 진정이라 우겨 말하면

어느 누구 하나가 홀로 일어나

아니라고 말할 사람 누가 있겠소?

눈앞에 떠오는 친구의 모습

흩날리는 꽃잎 위에 어른거리오

저 멀리 들리는 친구의 음성

달리는 기차 바퀴가 대답하려나


1971년, 한국 대중음악에 불멸의 앨범이 탄생했다. 바로 대도레코드에서 발매한 앨범 <김민기>이다. 커버 중앙에 자리잡고 있는 스물한 살 김민기의 표정이 인상적인 음반이다. 음반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김민기의 얼굴만큼이나 음유적인 기품이 서려 있다.

이 음반은 재킷의 우울한 보라색만큼이나 혹독한 고초를 겪게 된다. 어떤이는 저주받은 걸작이라고도 했다. 음반이 금지된 후로는 수백만 원으로 거래된다는 소문이 나돌만큼 음악 애호가들의 희망 소장목록 1호이기도 했다. 오늘날 앨범 <김민기>은 유재하의 <사랑하기 때문에>, 들국화의 데뷔 앨범과 어깨를 겨루는 대중음악의 명반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친구>는 이 앨범 A면 첫 곡으로 수록되어 있다. 내가 김민기라는 노래꾼을 처음 알게 된 곡이기도 하다. <친구>는 상실의 슬픔이 잔잔한 기타 선율에 실려있다. 이 곡은 연주는 최대한 절제한 체, 오로지 노래하는 이의 낮은 소리만에만 집중한다. 이 곡을 감상할 때는 호흡을 낮춰야 한다. 그 상태에서 노랫말에 빠지다보면 어느덧 고요한 슬픔이 다가온다.


<친구>의 창작 사연은 김민기의 고3 시절로 올라간다. 당시 강원도 삼척시(지금은 동해시)에서 한국 잼버리 야영대회가 있었다. 여름에 열린 대회 기간 중 태풍으로 인한 인명 피해가 발생했던 모양이다. 이날의 사고로 김민기의 후배가 사망했다. 김민기는 후배의 죽음을 전하기 위하여 서울로 가던 기차에서 <친구>를 만들었다고 한다.

잼버리 대회라고 하니까, 문득 새만금에서 열렸던 세계잼버리 대회가 떠오른다. 이때도 각종 사고가 끊이지 않아서 전 세계의 우려와 조롱을 사지 않았던가. 그때 우리는 보았다. 무능력과 우왕좌왕을, 남 탓에 분주하던 위선을. 망신과 그 부끄러움은 국민의 몫이었다. 아무튼 김민기의 <친구>가 말썽 많았던 잼버리와 관련 있다니 흥미롭다.


<친구>는 청춘의 죽음에게 바치는 레퀘엄이다. 곡조는 잔잔하고 무겁지만 선율은 서정적이다. 당시 김민기의 많은 곡을 양희은이 불렀지만 <친구>는 그녀의 청아한 목소리가 감당할 수 없는 곡이다. 오직 김민기의 낮고 묵직한 저음만이 소화할 수 있다.

<친구>는 김민기의 사적인 애도(哀悼) 곡이지만 창작 의도와 달리, 불의한 권력에 저항하는 노래로 자리 잡게 된다. 흔히 <아침이슬>, <상록수>와 더불어 <친구>를 김민기의 대표적인 저항곡이라 꼽는다. 비록 격렬한 거리의 투쟁곡은 아니지만 서정성이 남다른 비장미를 느끼게 한다.


모든 죽음은 안타깝고 살아 있는 자에게 아픔을 남겨준다. 특히 청춘의 죽음은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키곤 한다. 전태일이나 박종철의 죽음처럼. 젊음이 늙음보다 먼저 사라진다는 것은 정상적인 생명의 순환이 아니기 때문이다. 살아갈 날들이 많았던 이의 뜻밖의 죽음은 통곡의 바다를 만드는 법이다. 세월호 참사를 떠올려보라. 그때 전국은 상갓집이었다.

작년 10월 29일, 생때같은 청춘들의 죽음이 있었다. 그날은 괴기스러운 핼러윈 날이었다. 마치 악령의 저주 같이 159명의 죽음(외국인 26명 포함)이 이태원 좁은 골목에서 벌어졌다. 미개국에서나 벌어질 만한 비극이었다. 그 참사의 과정과 결과는 알려져 있으니 긴말은 필요 없겠다. 그것은 무능과 비겁함, 후안무치의 참극이었다.

최근 할리우드 영화사 파라마운트가 이태원 참사를 영화화 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영화 제목은 ‘눌러 뭉겨지다’란 뜻인 크러쉬(Crush)이란다. 한데 어찌 된 영문인지. 국내 상영 계획이 없다고 한다. 우리 사회에서 벌어진 사건을 볼 수 없다니, 황당할 뿐이다. 능히 그 연유가 짐작은 된다. 후안무치한 그들에게 영화 ‘크러쉬’는 께름칙한 악몽일 테이니 말이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다. 159명의 죽음이 망각되길 바라는 그들에게 한마디 하고 싶다. ‘훗날 역사는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이 죽음을 어떻게 기록할는지. 두렵지 않은가.’라고... 대체 ‘그냥 인간’, ‘먼저 인간’이 당연시되는 그런 날은 언제쯤 올련지. 마음이 추워진다.


모든 생명에는 우주의 역사와 섭리가 서려있다. 오늘은 159명의 사라진 우주를 애도하는 심정으로 김민기의 <친구>를 늦은 밤까지 들어보고 싶다. 삼가 별이 된 청춘들께 머리를 조아린다.


keyword
이전 12화아름다운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