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사람

김민기 다시 듣기 10

by 박신호

어두운 비 내려오면

처마 밑에 한 아이 울고 서 있네

그 맑은 두 눈에 빗물 고이면

음~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

세찬 바람 불어오면

벌판에 한 아이 달려가네.

그 더운 가슴에 바람 안으면

음~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


새 하얀 눈 내려오면

산 위에 한 아이 우뚝 서 있네

그 고운 마음에 노래 울리면

음~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

그이는 아름다운 사람이어라


잔잔한 기타 선율이다. 한 낮 교정을 거닐며 김민기의 <아름다운 사람>을 들어본다. 귀는 편해지고 마음은 가을 하늘처럼 깊어 간다. ‘왜 사는지?’와 같은 번잡한 기운이 밀려올 때면 찾았던 노래다. 차례 반복해서 듣고 나면 마음에 틈이 열린다.

널리 알려진 곡은 않았지만 언젠간 한 번쯤 들었음직한 선율이다. 울적할 때면 무거운 마음을 달래주는 따스함, 잔잔하고 고요한 김민기 음성과 맑고 청아한 ‘현경과 영애’의 음색들. <아름다운 사람>을 만든 이와 노래를 불렸던 그녀들이다.


유신 정권의 감시 대상이었던 김민기는 음반 활동이 불가능했다. 대신 양희은의 목소리를 통하여 자신의 노래를 풀어냈다. 하지만 <아름다운 사람>은 양희은이 아닌 현경과 영애라는 생소한 포크 듀엣이 1974년에 발표했다. 그 사연은 1971년도 서울대 미대 신입생 환영회로 거슬러간다.


이날 환영회 때 사회자가 ‘누구 노래하고 싶은 사람 없냐’고 묻자, 두 여학생이 번쩍 손을 들었다고 한다. 71학번 새내기 박영애와 이현경이었다. 이들의 노래를 들은 김민기가 훗날 그녀들에게 건네준 곡이 <아름다운 사람>이다. 이들은 1974년에 ‘현경과 영애’라는 <아름다운 사람>을 타이틀로 소박한 음반을 발표했다. 이 앨범은 이들의 처음이자 마지막 작품이다. 현재 이현경은 마음 치유사로 박영애는 일본에 살고 있다고 한다.

‘현경과 영애’ 음반은 포크 음악을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귀한 앨범이다. 그녀들의 목소리는 오염되지 않은, 말 그대로 청아한 시골 소녀의 마음처럼 맑다. 요즘 ‘현경과 영애’ 음반은 귀한 탓에 백만 원이 넘은 호가라고 한다. 물론 이들의 노래는 언제나 들을 수 있다. 유튜브에 현경과 영애를 검색해 보라. 반세기 전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커버 사진과 함께 풋풋한 이들이 고운 음색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아름다운 사람>의 노랫말을 음미해 본다. 먼저 처마 밑에서 한 아이가 울고 있다. 이 아이는 세상을 힘겹게 살아가는 모든 이들을 의미한다. 그렇게 울던 아이가 울음을 그치고 세찬 바람 속을 힘껏 달려간다. 생의 의지, 삶의 약동, 마치 무명의 복서 록키처럼 운명을 다 던진 체 삶의 에너지를 불태우고 있다. 결국 아이는 축복 같은 눈을 맞으며 산 위에 우뚝 서 있게 된다. 고진감래요, 삶의 숙제를 모두 끝을 낸 인간 승리이다. 마치 노랫말의 짜임이 김민기의 명곡 <봉우리>의 예고편 같다.


노래 속 아이는 흙탕물에서 피어난 연꽃 같은 존재다. 삶의 갈림길에서 부조리와 타협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갈 뿐이다. 달달한 탕후루와 같은 가짜 인생이 아니다. 그것은 삶의 희로애락을 견뎌낸 이들에게 풍겨 나는 품격이다. 거창한 독립유공자, 민주열사, 자본가, 노련한 정치가, 명망 있는 예술인들이 아니다. 짐을 등에 지고 인생이란 사막을 건너가는 낙타와 같은 갑남을녀들. 세상의 낙타들이 아름다운 사람들이다.


곧 김민기의 아쉬람 극단 학전이 개관 30주년을 맞이한다. 문화창작자 김민기에게 극단 학전은 배움의 터전을 뜻한다. 글자 그대로 배울 學, 밭 田인 것이다. 이 배움터에서 자라나 세상으로 나온(出世) 이들을 꼽아본다. 설경구, 황정민, 김윤식, 조승우, 김광석, 유재하, 강산에, 윤도현, 장필순, 이소라, 나윤선 등 숱한 무명의 새내기들이 김민기의 등을 타고서 이 시대의 문화를 일구었다.


언제가 기자가 김민기에게 “학전 출신 성공한 후배들을 보면 흐뭇하겠어요.”라고 물었다. 그 말에 한동안 뜸을 들이던 김민기가 낮은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성공한 애들보다 그냥 묻혀버린 경우가 더 많지요. 어~휴 그 애들이 자꾸 눈에 밟힙니다.”라고. 극단 학전에서 수도승처럼 살아가는 그의 이 아름답다.


지금 극단 학전에는 <우리는 친구다>. <무적의 삼총사>, <고추장 떡볶이> 같은 아동극 공연을 상연하고 있다. 많은 수익을 안겨 준 <지하철 1호선>과 <감광석 다시 부르기>를 만류에도 불구하고 마무리했던 김민기. 경제적 어려움에도 아동극을 사명처럼 열고 있는 그야말로 어쩔 수 없는 아름다운 사람이다.

올 겨울 학전을 찾아서 아동극을 관람해 볼까? 아름다운 사람, 아름다운 마음들을 만나다 보면 마음에 덧난 자리도 아물고 호흡은 깊어질 것이다. 그러면 된다. 그러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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