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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신호 Apr 27. 2024

너른 바다에 풍덩!

< 동해바다, 후포에서> - 신경림

친구가 원수보다 더 미워지는 날이 많다

티끌만 한 잘못이 맷방석만 하게

동산만 하게 커 보이는 때가 많다

그래서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남에게는 엄격해지고

내게는 너그러워지나 보다

돌처럼 잘 아지고 굳어지나 보다  

   

멀리 동해바다를 내려다보며 생각한다

널따란 바다처럼 너그러워질 수는 없을까

깊고 짙푸른 바다처럼

감싸고 끌어안고 받아들일 수는 없을까

스스로는 억센 파도로 다스리면서

제 몸은 맵고 모진 매로 채찍질하면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뻔한 말인 듯, 깊은 말인 듯 알쏭달쏭하다. 오래전 입적하신 성철스님의 법문으로 알려진 유명한 글이다. 설핏, 헤아려보자면 본질을 응시하라는 의미로 풀이된다.    

  

 삼십 년째 국어 교사로서 업을 삼고 있다. 강산이 세 번 변하도록 우리말과 문학 속에 살았다면 응당 국어의 달인이 되어야 맞다. 하지만 부끄럽게도 문학이든 비문학이든 설익은 밥처럼 자신 없다. 시의 경우도 그렇다. 간혹 시문학 단원 수업을 마칠 때면 한숨이 나온다. 교사 지도서에 적힌 대로 가르쳤으니, 한 마리 구관조가 로 없다.  

   

 지금까지 학생들에게 가르쳤던 시 작품이 가히 편은 넘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시를 만나면 , 누구냐?’라고 묻는다. 생각건대 시를 시로 대하지 못하고 문제 풀이의 대상으로만 접했기 때문이 것이다. 교사가 이 지경이니 학생들 역시나 헤매는 것은 마찬가지다. 가르치는 자, 배우는 자, 모두에게 시는 신기루처럼 손에 잡히지 않은 그 무엇이다.


 신경림의 <동해바다, 후포에서>EBS 교재에 수록되어 있다. 수능 시험과 연계된다는 방송교재이니 교사나 학생은 득점의 수단으로 이 작품 대할 것이다. 이렇듯 시를 바라보는 미학적 감상의 본질은 사라지고 점수만 남겨진 꼴이니,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라” 하겠     


 사실 수능 국어영역에서 출제되는 시는 정선된 우수한 작품들이다. 문제는 이들 작품을 수사법, 모순 형용, 주제, 소재, 화자의 태도 등으로 난도질하는 순간에 있다. ‘귤이 회수를 넘어가면 탱자가 된다는 속담처럼 문학의 미적 감성은 사라지고 난이도만 따지는 박제된 신세로 전락하는 것이다. 그것은 감수성의 파괴임과 동시에 미의식의 몰락이다. 하긴 문학에 답이 있다는 생각 자체가 난센스이다. 


 비록 시에 무지하지만, 삼십 년 국어 선생을 하다 보니, 마음을 흔드는 시를 만나면 화들짝 감동에 젖곤한. 가령 스무 살 시절, 라디오에서 나오는 신경림의 <갈대>를 듣고선 혼을 빼앗겼고, 이수익의 <우울한 쌍송>를 외우면서 첫 셀렘이 보내주는 편지를 기다리곤 했다. 교사가 된 후 만났던 백석의 시는 절창이었다. “명절날 나는 엄매 아배 따라 우리 집 개는 나를 따라 진할머니 진할아버지가 있는 큰집으로 가면...”으로 시작하는 <여우난곬족>의 정경은 내 어린 시절이었다.     

 누군가 내게 좋아하는 시 있어요?”라고 물으면 <동천>이라고 뻔뻔한 답을 한다. <동천>은 미당 선생의 4행으로 된 짧은 시다. 이 네 줄로 된 간단한 시를 나는 여태껏 암송 못하고 있다. 참으로 한심한 국어 교사이니, 저 세상에 계실 미당 선생님도 미간을 찌푸릴 것 같다.   

   

 갈라진 논바닥 같은 메마른 감성이건만의 한때는 암송했던 시도 있었으니,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 <세월이 가면>이다. 특히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어서도...’ 시작하던 <세월이 가면>은 아련한 사랑의 환몽에 사로잡히곤 했다. 박인환의 시를 노래로 읆었던 통기타 가수 박인희의 음색은 그리움을 떠오르게 했다. 긴 머리에 청아하고 가녀린 박인희가 <목마와 숙녀>를 고독하게 부르면 버지니아 울프, 그녀가 사랑스러웠다.     


 신경림의 <동해바다, 후포>도 외우고 싶어지는 시다. 시인은 일상의 경험을 열면서 독자에게 말을 건네고 있다. 동시에 묵직한 사유도 던져준다. ‘친구가 원수처럼 미워지는 날..’. 거리가 먼 사이와는 싸움도 일어나지 않는 법이다. 내면을 할퀴는 고통은 근거리에서 발생한다. 뿐이겠는가. 상처 또한 쉽사리 완치되지 않는다.     

 타인에게는 엄하면서도 자신에게 너그러운 합리화. 어쩔 수 없는 중생심이다. 내 중심이라는 원심력을 뿌리치기란 쉬운 일이 아니. <동해바다, 후포>에서 화자는 너른 동해를 응시하고 있다. 푸른 창해에 자신을 비추 보는 것이다. 세숫대야처럼 품이 좁은 내가 머리를 들고서 망망대해를 바라본다. 내면의 관조는 참회로 가는 길이다. 화자의 눈은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바다를 명상하듯 바라본다.     


 몇 해 전부터 장기기증을 고민했었. 평생 헌혈 한번 안 했지만, 이제 용기를 내보고자 한다. 지금 내 업무 수첩 속지에는 얼마 전 산행길에 받았던 사랑의 장기기증 신청서가 들어있다. 아직 가족은 모르고 앞으로도 알리고 싶지 않다. 언젠가 내 피붙이들이 유가족이 될 때면 이 사실을 알게 되겠지만.  

   

 나는 풍족한 돈도, 마땅한 달란트도 없다. 그러니 먼 길 나설 때 내놓을 것이라곤 몸뚱어리뿐이다. 하여, 몸과 마음을 주저 없이 너른 바다에 훅 던질 수밖에. ‘백척간두진일보’ 요, 인당수와 합체가 된 심청이다. , 펜을 들고, 장기기증 신청서에 서명하자. 한 없이 푸르른 동해 바다로 풍덩! 괜찮은 참회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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