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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신호 Jun 13. 2024

내 마음의 앨범 <신형원2집>

  “진정 헤어짐은 슬프지 않네 / 우리가 사랑한 것은 거짓이었네 / 지난 그 세월이 못 미더워도 / 사랑했던 마음으로 돌아서야지 // 때아닌 계절에 나뭇잎 지고 / 예기치 않은 바람 아~ 무정한 그 바람 / 사랑 헛된 꿈은 낙엽이던가 / 떨어진 낙엽 밟으며 나는 가야지- <예기치 않은 바람> 신형원. 한돌 작사 한돌 작곡.  


  때아닌 소동이 났다. 무슨 일인고 하니, 인근 모 대학교 축제 행사에 대세 아이돌 뉴진스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현재 근무하는 곳이 남자고등학교다 보니 오전부터 학생들이 술렁거렸다. 몇몇 녀석들은 아애 야간 자습을 않겠다며 담임선생의 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녔다.  


  그날 2교시 수업 때 일이다. 한 녀석이 내게 뉴진스를 아느냐고 물었다. 다른 학생들도 흥미롭다는 듯이 답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자칫 이런 경우에 잘못 말했다가 낭패를 당할 수 있으니 긴장해야 하다. 나는 잠시 뜸을 들다가 “ 그래. 알고 있지. 뉴진스 귀엽긴 한데, 가창력은 별로잖아”라고 했다. 말이 끝나자 녀석들이 항의성 탄식을 내뱉었다.    



   ‘르세르핌, 피프티삐프디, 아이브, 에스파 등... 요즘 아이돌 그룹명은 발음하기도 난감하다. 이들의 요란한 춤사위를 보노라면 기름 범벅인 요리를 삼킨 듯 느끼하다. 그럴 때면 담백한 가수, 담백한 노래가 그리워진다. 바로 신형원 같은 가수 말이다.  굵은 안경테와 지적이면서도 편안한 외모. 긴 머리에 청바지를 입은 옆집 누나 같은 가수다.  

    

   어떤 이들은 신형원을 가리켜 한국의 존바에즈라 했다. 저항하는 포크 여가수 존바에즈? 동의할 수 없다. 그냥 신형원은 옆집 누나 같은 다정한 이미지다. 나는 <신형원 베스트> 앨범에 나와 있는 그녀의 얼굴을 좋아한다.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의 미소랄까. 신형원이 가수로 출발했던 곳은 인기 DJ 이종환이 운영하는 쉘부르였다. 그곳은 세시봉과 더불어 한국 포크음악의 아쉬람이다.


  84년도. 교실이 아닌 강의실과 향긋한 샴푸와 독한 파머 냄새를 풍기던 여학우들. 흰머리에 담배를 피우시던 노교수님. 어수선한 5 공화국 그사이 어디쯤 나는 있었다. 나의 어설픈 캠퍼스 생활을 신형원의 첫 인기곡 <불씨>와 <유리벽>이 다독여 주었다. 잔잔하면서도 음유적인 노랫말에 취했던 새내기 시절이었다   


  고향을 지키라는 명을 받았다. 이른바 방위병였으니 출퇴근이 가능했다. 덕분에 친구 은철이 집을 자주 찾았다. 허리 통증으로 휴학 중이던 은철이는 내게 헤겔의 변증법을 설명해 주었고, 철학에세이를 권했으며. 5.18의 진실을 담고 책들을 빌려주었다. 박종철이 죽었고, 이한열이 쓰러졌던 1987년이었다.      

  

하루는 은철이가 통증에 얼굴을 찡그리며 서울로 가야 한다며 찾아왔다. 그렇게 은철이는 내게 돈을 빌려서 터미널로 향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6월 29일. 신군부 출신 노태우가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한다는 발표를 했다. 모두가 귀를 의심했다. 뭐야? 전두환의 항복! 거리는 환호로 가득했고, 나는 '오늘 하루는 공짜'라는 커피숍에 갔다.      

 

  은철이는 다시 내려왔고 우린 만날 때마다 민주, 노동자, 통일 등 감당하지 못할 주제를 이야기했다. 토요일이었나? 은철이 집 라디오에서 우렁찬 전주곡이 나오고 있었는데 신형원의 새 노래라고 했다. 한데 노랫말이 장난이 아니었다.   


 “… 백두산의 호랑이야 / 지금도 살아 있느냐 / 살아 있으면 한 번쯤은 / 어흥하고 소리쳐봐라 / 얼어붙은 압록강아 / 한강으로 흘러라 / 같이 만나서 / 큰 바다로 흘러가야 / 옳지 않겠나”    


  <터>라는 곡이다. 우린 노래를 들으면서 숨도 못 쉴 만큼 감동했다. 백두산, 압록강, 한강, 호랑이, 그날은 꼭 오리라... 아 이런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세상이구나. 통일에 대한 노래를 이렇게 대놓고 공중파에서 보내다니. 그날의 감격이 생생하다. 청춘의 아픔을 말했던 신형원이 민족 통일을 힘차게 노래하고 있었다.    


   <터>는 신형원 2집에 수록되어있다. 이 앨범에는 아홉 곡이 담겨있다. 1.예기치 않은 바람 2.철새 3.무관심 4.새벽기차 5.아침으로 가는 길 6.개똥벌레 7.비오는 날의 가단조 8.터 9.갈래. 이 가운데서 가장 아끼는 곡은 <예기치 않은 바람>이지만 <새벽기차>와 <비오는 날의 가단조>도 비범하다. 물론 가장 널리 알려진 곡은 <개똥벌레>이다. 지금까지도 <개똥벌레>는 누구나 즐겨부르는 국민애창곡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문세에게 이영훈이 있었다면 신형원에게는 한돌이 있다. '한돌' 강한 이름이지만 정작 외모는 인자한 외할아버지의  분위기였다. 언젠가 순천 와온에 있는 대안학교 사랑어린배움터에 그와 마주쳤는데. 백발에 빙그레 웃는 모습이 편하게 보였다.   


  신형원 하면 빼놓을 수 없는 노래가 있으니 <서울에서 평양까지>과 훗날 故 김광석이 다시 불렸던 <외사랑>을 들 수 있다. 이제는 60 중반이라는 신형원. 7080 무대에 나타난 그녀는 초로의 길목에 있었다. 손뼉을 치며 <터>를 부르는 그녀를 보다가 문득 이런 가수와 노래들이 있어서 행복했구나 싶어졌다.


  뉴진스 때문에 조퇴한다는 녀석들을 보면서 한생각이 들었다. 저들이 흰머리가 날때 쯤에도 <ETA>를 흥얼거릴까. 아마도 개똥벌레를 더 좋아할것 같은데... 그도 아니면 트로트를 좋아하겠지. 이 밤 신형원의 노래모음을 듣는다. 이런 음악을 듣는 내가 그냥 좋고, 그냥 흐믓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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