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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신호 Jul 30. 2024

1장 배움의 길

내가 읽는 <배움의 도>

무슨 일이 배움터에서 일어나는 지,

그것은 설명할 수 없다.

설명될 수 없는 것은

배움터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일이 어떻게 일어나는가,

그것이 道다.

배우는 과정에서 일이 어떻게 일어나는가,

그것이 배움의 道다.

사람 말로 표현되는 배움의 길은

참된 배움의 길이 아니다.    

 

배움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자 애쓰지 말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판단하지 말고,

그것에 자신을 열어 놓아라.     


일이 어떻게 일어나는가,

그것이 道다.     


경전은 기름진 밭이다. 애써 씨를 뿌린 일꾼들에 실한 열매를 안겨 주기 때문이다. 때로는 부실한 씨앗마저도 인자하게 감당해 준다. 그래서 고전은 후학들의 숱한 찬탄과 시비를 퇴비 삼아 더욱 윤택해진다.    

  

 기원전, 황하 유역은 천하의 주인 자리를 놓고 숱한 생명과 국가들이 난립했다. 그 혼란의 수습책을 고민하던 무리들을 가리 백가쟁명(百家爭鳴)이라 한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스스로 그러할 뿐’이라는 자연(自然)을 해법으로 제시했다.      


<도덕경>은 수천 년간 반복과 변주를 더하면서 왕필과 같은 풍요로운 해석과 이종(異種)을 배양했는데 그 헤아림이 아득할 지경이다.  인터넷 서점 검색창에 ‘도. 덕. 경’ 세 음절을 입력해 보라. 무려 오백종이 넘는 검색 결과들이 화면을 가득 채울 것이다.     


여기 <도덕경>이란 기름 진 밭에 교육을 파종한 이가 있었으니 ‘파멜라 메츠’라는 분이다. 에 대한 자료는 미비하여 종적을  알 수는 없지만 <배움의 도>와 <농사의 도>를 썼다고 하니 노자의 뜻을 섬겼던 파란 눈의 현인이라 짐작돤다. <배움의 도>는 <도덕경>을 배움과 가르침이란 주제로 리모델링한 교육 경전이다.


파밀라 매츠의 <배움의 도>를 우리말로 풀어낸 옮긴이는 관옥 이현주 목사다. 관옥 선생은 미소가 고운 분이다. 지난 세월 많이 뵈었는데 시대의 현자(賢者)라 불려도 손색없는 어르신이다. <배움의 도>는 노자의 원음을 파멜라 매츠가 각색했고, 관옥 선생이 마무리한 셈이다.


이쯤 해서 서문에 실려있는 옮긴이의 말을 들어보자.


“이 책을 가슴으로 읽고 몸으로 실현코자 각오를 새롭게 다짐하는 당신의 희망과 용기에 경의를 표합니다. 당신은 지금 혁명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관옥 선생은 이 책을 읽는 것 자체가 혁명이라 다. 물론 마지막 장을 을 때까지 섣불리 답할  없지만.  


어느새 정년의 끝자락이 보인다. 몇 해 전부터 퇴직의 시점을 조율하면서 출퇴근을 반복한다. 아이들과의 소통의 한계는 뚜렷한데 작금의 교육 현장은 정을 붙일 수 없게 다. 배움 대신 이념과 민원이 무성한 교단. 기꺼이 물러가야 때임을 알겠다.   

  

강산이 세 번 바뀌도록 국어 교육을  업으로 살았지만 ‘우리말’과 ‘교육’에 대해서 내세울 의견이 없다. 달리 말하면 생각이 없다는 의미가 될 터이니 창피한 일다. 이제  <배움의 길>를 읽어가면서 뒤늦게 부끄러움의 체를 둘러봐야겠다. 허깨비 같은 나와 우리 시대의 교육을 말이다.


1장 '배움의 길'에서는 배움터에서 일어나는 일을 애써 판단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그저 자신을 열어두라고 말한다. 하지만 내가 경험한 교직은 교육과정이란 명목으로 애써 판단하고 강행했던 자리였.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온통 흐릴 뿐이니 배움이 부족한 탓이리라.     


그러하매 1장 '배움의 길'에서부터 81장 '단순한 진리'까지 경전에 깃든 신령한 기운이 내게 스며들기를 소망한다. 배움과 가르침의 작은 실타래를 잡아야 삼십 년 교직 세월이 민망하지 않을 것이다.


그동안 마주했던  숱한 맑은 눈동자들이 떠오른다. 그리고  미안해진다. 그 민망함 덜고자 <배움의 도> 앞에 무릎을 꿇고 시작종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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