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첫․마.음

by 박신호

첫눈 같은 미사를 드렸다. 얼마 전 서품을 받은 새 사제가 집전한 주일 아침 미사였다. 땅끝 해남 출신이라는 젊은 신부는 해맑은 보리 싹처럼 파릇파릇했다. 서품식 후 첫 미사는 출신지 해남성당에서 집전했겠지만, 소임을 맡은 성당에서의 미사는 오늘이 처음이다.


일요일이면 아침 8시에 집을 나선다. 집과 성당의 거리는 10분이면 도착할 만큼 가깝다. 오늘도 평소처럼 그 시간에 갔건만 성당에는 전과 달리 제법 많은 교우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무슨 행사가 있나?’ 의아해하면서 성호를 그었다. 자리에 앉아 숨을 고르는데, 뒷좌석에 있는 교우들이 주고받는 소리가 들렸다.


“오늘 새 보좌 신부님이 안수를 주실까?”, “그러게, 안수받으러 왔는데...” 그제야 교중미사가 아닌 이른 아침 미사 시간에 교우들이 가득했던 이유가 이해되었다.

첫 사제의 첫 미사라... 풋풋함이 느껴진다. '맨 처음'을 뜻하는 관형사 '첫‘ 싱그러운 단어다. 첫출발. 첫사랑, 첫 직장. 모든 ‘첫’에는 아기의 걸음처럼 불안한 내딛음이지만 그 안에는 눈부심이 들어있다. 화장기 없는 십 대 소녀의 맑은 볼처럼 어설픈 아름다움과도 닮았다. 4월 산하에 두루 퍼지는 연둣빛 같은, 개화 직전의 꽃망울인 듯. 눈에서 뗄 수 없는 ‘첫’이다.

절집에는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이란 말이 전해온. 의상대사의 <법성계>에 나오는 글귀로써 ‘첫 마음이 곧 깨달음’이란 의미다. 산문(山門)에 발을 내딛는 그 순간이 깨달음이뜻일 테니 첫 마음의 중요함을 강조하는 글이다. 그것은 계산 없는 맑음이요. 사사로움이 껴들지 않은 상태이다.


올해는 을사년이다. 내가 태어났던 해가 을사년이었으니, 60 갑자가 한 바퀴 돈 셈이다. 흔히 말하는 환갑(還甲)이 된 것이다. 몇 해 전 순천에 계시는 어느 목사님께서 환갑은 다시 한 살이 되는 날이라 했다. 생각해 보니 의미가 깊은 말씀이다.

생애 두 번째 맞이하는 을사년. 얼떨결에 살아왔던 지난 60년과 달리, 맑고 깊은 삶의 자세로 삶의 겨울철을 보내고 싶다. 바야흐로 두 번째 맞이하는 한 살. "내가 해봐서 아는데~" 따위의 건방을 떨지 않는 느긋한 한 살이 돼 보련다.

신임 마오로 신부는 담당 소임지에서의 첫 미사가 긴장되었는지, 미사 지향 낭독을 깜빡했다가 뒤늦게 읽었다. 교우들은 작은 웃음으로 새 신부를 격려했다. 보아하니 교우들 눈빛이 아들이나 손주를 보듯 꿀이 뚝뚝 떨어지고 있다. 그렇게 새 사제의 첫 미사는 무난히 마무리되었다.


신자들에게 강복을 주는 새 사제 마오로의 맑은 목소리가 싱그럽다. 푸르른 그를 위하여 한살맞이가 나지막이 기도를 올린다.


"서설에 피어난 매화 꽃망울처럼, 매향 가득한 맑은 사제가 되소서."

keyword
작가의 이전글베토벤과 겨울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