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 없는 세상을 상상해 본다. 익숙했던 생활들이 낯설어지면서 세상은 적막강산이 될 거다. 밤이 되면 촛불을 켤 것이고 겨울이면 난로가 다시 등장할 것이다. 냉장고도 없을 테니 먹거리도 바뀌고. 컴퓨터와 TV도 불통이 되겠지. 뿐이랴. 청소기, 세탁기도 볼 수 없겠으니 주부들 한숨이 높아질 것이다.
물론 오디오도 무용지물이겠으나. 오디오 없는 세상은 상상만 해도 우울해진다. 무슨 낙이 있겠는가. 나름 귀명창이란 자부심으로 음악을 감상해 왔는데 오디오의 종말은 재앙이 될 것이다.
전축, 컴포넌트, 오디오 뭐라 불려도 좋다. 음향기기 덕분에 내 삶은 윤택했으니까. 피곤할 때면 몽환적인 켈트 음악을, 지난날이 아른거리면 청춘의 음악을, 명절날 들려오는 나훈아 노래는 혈육 정(情)을 돋우지 않았던가. 음악이 사라진 세상은 폐병 환자의 창백한 얼굴과 별반 다를 것이 없으리라. 혹자는 풀벌레와 새들의 소리는 어떠냐고 내게 묻는다면 그대나 숲에 살면서 실컷 즐기라고 답하겠다.
오디오가 없던 시절에는 발품으로 음악을 들었다. 그때의 담배 연기가 떠다니던 어두컴컴한 음악감상실이 떠오른다. 스무 살 시절에는 아방가르 음악 감상실을 부리나케 출입했고 , 서른 무렵부터는 베토벤 고전감상실에서 클래식 세례를 받았다. 의자에 파묻혀 선율에 빠질 때면 시공마저 아늑해서 태아적 자궁 안이 이럴거라 상상했다.
오디오로 교향곡을 들을 때면 공작, 백작과 같은 귀족이 부럽지 않다. 내 손이 버튼에 닿으면 이름난 연주자들의 향연이 곧장 펼쳐 지지니 말이다. 중세 때 음악은 소수 왕족과 귀족의 전유물이었다. 당시 그들은 전속음악가를 거느리고서 자신의 청각을 즐겼다고 한다. 연주자 또한 급여를 주는 주인을 위하여 부지런히 연주했다고 한다.
노래를 좋아했던 아버지께서 큰 마음을 먹고서 전축을 사 오셨다.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배호, 남진, 나훈아와 같은 가수의 노래를 주야장천으로 들었다. 전축은 우리 집의 첫째가는 자랑이었다. 안방 벽면에 자리했던 네모난 갈색 전축이 지금도 생생하다. 몇 해 뒤 TV가 들어오자 전축은 작은방으로 유배를 떠났지만, 아버지는 냉기가 맴도는 그곳에서 음악을 듣곤 했다. 얼마 뒤 전축은 서울로 이사를 하는 과정에서 처분되었다.
걸으면서 음악을 듣는 ‘소니 워커맨’는 사춘기 아이들의 로망이었다. 워커맨은 일종의 움직이는 오디오였다. 친구에게 빌려 들어본 워커맨의 음향은 천상의 울림이었다. 그날 이후 열렬히 워커맨을 바랐건만 대학생이 되고 나서야 저렴한 국산 워커맨을 가질 수 있었다. 꿩 대신 닭인 셈이지만 대학가요제 노래를 듣는 데는 지장 없었다.
하루는 친구가 찾아왔다. 미니 오디오를 사는데 함께 가자고 했다. 당시 ‘작지만 크다’는 광고로 유명했던 제품이었다. 친구와 충장로에 있는 오디오 매장을 찾아가는데 마치 내 것을 사는 것처럼 들떴다. 해 질 무렵, 나와 친구는 오디오 본체와 스피커를 나눠 들고는 유쾌하게 걸었다. 친구는 고맙다면서 스낵 코너에서 돈가스를 사줬고, 나는 녀석에게 축하 선물로 <듀란듀란> LP 음반을 선물했다.
그때 나는 오디오도 없으면서도 음반을 구입했다. 보랏빛 바탕에 멋진 오토바이를 타고 있는 프린스의 히트 앨범이었다. 머잖아 내게도 아담한 오디오가 생기리라 희망을 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그때 구입했던 프린스의 <purple rain> 앨범은 소리 한 번 내지 못하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오디오를 컴포넌트라 명명했던 어느 날. 드디어 우리 집에도 오디오가 생겼다. 4칸짜리 본체와 내 허리만큼 높았던 스피커. 가운데는 유리막까지 설치된 당시에는 제법 유명했던 아남제품이었다. 사고로 장애를 입으신 아버지의 여흥을 위한 오디오였다. 그날 아버지는 <최진희> 앨범을, 나는 <휘트니 휴스턴> 음반을 턴테이블에 놓고서 음악을 들었다. LP 음반에서 살짝 들리던 아날로그 소리는 정겨웠다. 몸이 불편했던 아버지도, 취업에 고심하던 나도 행복한 순간이었다.
지금도 LP 음반과 카세트테이프가 수백 개가 있다. 그러면 뭐 하나. 이제는 턴테이블도, 카세트 플레이어도 없으니 필요 없다. 하지만 이상하게 버릴 수가 없다. 대신 LP음반 턴테이블이 있는 지인을 만나면 음반을 선물로 주곤 한다.
LP 음반이 CD 음반으로 바뀐 지 한 세대가 지났다. 오디오 역시나 CD 플레이어로 대체되었다. 한때 MP라는 휴대 음향기기도 있었다. 돌이켜보니 오디오 변천사가 무상하다. 몇 해 전부터 스마트폰과 블루투스 스피커로 음악을 즐기고 있다. 최근에는 음원 파일을 결재하여 스마트 폰과 USB로 감상한다. 쉽게 구입하고, 듣고, 삭제하는 가벼운 시대가 씁쓸하기만 하다.
오디오 앞에 서면 두근거리던 날이 있었다. 음반을 작품이라 칭하면서 그 선율에 심신을 달래던 나날들이 그립다. 오늘날 음악은 순간에만 소비되는 일회용품 신세는 아닐는지. 자칫 인간관계도 음원처럼 가볍게 소모될지 모를 일이다.
근래 아날로그 감성으로 재무장한 오디오가 소량이나마 생산되고 있다고 한다. 어쩌면 잠들어 있는 내 음반도 깨어날 수 있겠다 싶어 반갑다. 다시금 정겨운 아날로그 음향이 들려온다면 엄마의 품에 잠든 아기처럼 아늑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