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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라디오 시대

by 박신호

아뿔싸 FM 92.3 주파수가 사라졌다. 어제 퇴근길에 자동 선곡 버튼을 잘못 건드린 탓인가 보다. 이를 어쩐다. 운전할 때마다 즐겨 들었던 채널인데... 차 안에서 음악을 즐기는 내게는 일종의 돌발사태였다. 어디로 갔을까? 내 친구 FM 92.3은.

FM 92.3은 클래식 전문 라디오 채널이다. 내 알량한 클래식 알음알이는 FM 92.3 덕이 크다. 바로크, 고전주의, 낭만주의 등 장르와 사라 장, 조수미, 손열음 등 음악가들의 노래와 연주도 FM 92.3에서 즐겼다. 어제만 해도 긴 연휴 뒤의 부담스러운 출근길이 멘델스존의 <이탈리안> 선율 덕분에 행복하지 않았던가.

늘 가까이했던 주파수가 사라지니, 망연자실까지는 아닐지라도 허전하고 아쉽다. 식사 후 양치를 안 한 것처럼 찜찜하다. 채널 안내 매뉴얼을 뒤져서 FM 92.3 주파수를 입력해야 한다는 조바심이 인다.


새삼 라디오가 귀하게 여겨진다. 아날로그의 대표 격인 라디오는 편안한 매체다. 곁에 있을 때 모르지만, 정작 안 보일 때면 찾게 되는 다정한 벗이다. 라디오는 묵은 된장처럼 오랜 세월, 내 곁에 있었다. 젊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일했던 세탁소에는 늦은 저녁 시간까지 라디오가 켜져 있었다. 남진과 나훈아. 바다 건너에서 유명하다는 카펜터스 같은 외국 가수의 음악도 그때 들었다. 뿐이랴. 하굣길에는 라디오 어린이 프로그램 <마루치와 아라치> 주제가를 부르면서 집으로 달려가곤 했다.


컬러 TV를 조우했던 날이 기억난다. 그날 식구들은 늦은 밤까지 총천연색의 향연에 취해 있었다. 텔레비전은 ‘금이야 옥이야’ 하며 국보 대접을 받았고, 라디오는 플러그가 뽑힌 채 먼지만 켜켜이 쌓이게 되었다. 더군다나 비디오와 워커맨이 등장하자 라디오는 말기암 환자 신세가 되어갔다. 길거리에서는 ‘비디오 스타가 라디오 스타를 죽인다’ <Video Killed the Radio Star>라는 팝송이 흐르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라디오는 굳건하게 살아있다. 아니, 오히려 지난날의 영광을 회복하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은 라디오가 지닌 아날로그의 미덕 때문이다. 시각, 청각, 촉각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모바일 영상의 유혹은 강하다. 지하철 승객들의 모습 떠올려 보시라. 다들 같은 표정들이다. 무표정한 얼굴로 핸드폰 화면을 쳐다볼 뿐. 기다릴 때도, 앉아서도, 심지어 내릴 때도 화면에 빠져있다. 도저히 영상을 이겨낼 제 간이 없어 보인다.

반면에 라디오는 청각 하나면 충분하다. 귓가에 울리는 이야기와 노래만 들으면 된다. 감각의 단순함이다. 식사 후, 눈을 감고 이어폰으로 들리는 라디오 음향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절로 이완 상태에 이르곤 한다. 그렇게 한동안 졸다가 깨어나면 몸과 마음이 상쾌해진다. 덕분에 다른 감각들이 휴식을 취한 격이니, 라디오는 영혼의 여백을 선사하나 보다.


영상의 세계는 쉼이 없다. 오직 있음과 없음, 곧 디지털의 0과 1만이 존재한다. 이 양극의 대치는 감각의 갈증을 불러일으킨다. 마치 해갈을 위해 마셨던 바닷물이 끝없는 갈증을 낳는 것처럼 말이다. 라디오는 감각이 중독될 염려가 없다. 주파수의 미로를 헤매다 보면 찍찍 끓는 소리를 들려온다. 그 잡음 때문에 감각은 절제되고, LP 음반처럼 아날로그 감성만을 더한다.


라디오는 사유의 힘을 준다. 청취자가 보낸 사연들이 무딘 의식을 생생하게 깨워준다. 생각의 공백을 하락하지 않는 유튜브는 얼마나 피곤하던가. 영상의 현란함은 마음을 격하게 만들고 감각은 무디게 한다. 마치 약물 중독과 닮아있다. 하지만 라디오는 제아무리 오랫동안 청취할지라도 감각을 훼손하지 않는다.


라디오는 추억의 앨범이다. 지금도 생각난다. 폭염이 한풀 꺾이고 찬 기운이 슬금슬금 오르던 스무 살 초가을의 저녁. 날은 저물어 창밖은 잉크 빛이었다. 그 순간 라디오에서 나오던 프로컴 할럼의 <A Whiter Shade of Pale>에서 흐르던 바흐의 선율과 스산한 목소리. 그해 가을과 하숙방 그리고 카세트 라디오는 한 장의 스틸 사진이 되어 추억의 창고에 보관되어 있다. 라디오는 나의 시간과 공간을 빚어내는 뮤직박스였다.

사회 진출을 앞두고 번민할 때 라디오는 아늑한 친구가 되어 주었다. 두 시가 되면 경박한 웃음으로 찾아오던 디제이와 세 시에 들려오던 경쾌한 시그널 음악과 DJ의 부드러운 음성. 해 질 무렵이면 라디오에 귀를 대고 들었던 영 팝스 진행자 황인용의 명쾌한 목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듯하다. 그리고 밤 열 시가 되면 이종환 아저씨를 만났다. “밤의 디스크쇼~”라는 그의 구수한 음성이 들려오는 어둠은 편안했고, 낮에 스며든 최루탄 내음까지 털어낼 수 있었다.


삶의 나이테가 늘어나면서, 이제 라디오는 운전의 동반자가 되었다. 일기예보와 뉴스, 클래식까지 토해내는 말동무다. 산책이나 등산, 걷기와 같은 운동을 할 때도 내게 말을 걸어준다. 두 팔과 다리를 움직이면서 들어보는 세상 소식들. 이제 라디오는 나의 노화에 발맞춰 느릿하게 걸어온다.


감각적인 영상을 이겨내기란 어렵다. 유튜브에 사로잡힌 노년의 삶은 끔찍하다. 자칫 요란한 가짜 뉴스에 현혹되어, 백발을 날리면서 충혈된 눈빛으로 광장을 배회한다면 어쩌란 말인가. 그런 끔찍한 모욕은 허용할 수 없다. 다행히 내 곁에 라디오가 있으니 감각의 중독으로부터 영혼을 지켜낼 수 있으리라.

‘지금은 라디오 시대’라는 말이 있다. 훗날, 쏟아지는 햇살이 굽은 내 등을 비출 때도 귓가에는 아날로그 선율이 들려오리니, 그때도 여전히 라디오 시대일 것이다. 그나저나 오랜 벗을 찾아야 한다. FM 92.3 주파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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