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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글빙글 도는 날의 푸념

by 박신호

오른팔 어깨에 통증이 찾아왔다. 회전근 파열과 같은 재앙까지는 아니지만 팔을 올릴 때마다 쿡쿡 찌르는 느낌이 불쾌하다. 전날 헬스장에서 상체 근력 운동을 하지 않았는데 이유를 모르겠다. 이런 통증에는 침 치료가 제격이다.

다음날 오전 동네 한의원을 찾았다. 한의원 상호는 도란도란이다. 그곳 여자 원장은 텐션이 높기로 동네에서 유명하다. 카운터에서 접수를 한 후, 칸막이가 드리워진 좁은 침구대에 누었다. 어느샌가 원장의 통통 뛰는 솔~음이 들려온다. 경쾌한 소리에 저절로 귀가 기울여진다. 덕분에 잠시나마 통증을 잊는다.

"호호호... 신호님 오랜만이네요. 그때 두통은 어때요? 아~. 오늘은 오른팔과 어깨가 아프다고요. 예 그렇군요. 근력 운동 때문인 것 맞아요. 딱 그 자리가 그런 자리거든요. 삼각근이죠. 일반 침과 약침, 두 방을 놓겠습니다. 하하하..."

에너지는 전염되는 법이다. 뜸, 부황, 침을 맞고 있는 우울한 환자들 사이로 명랑한 그녀의 웃음이 퍼져간다. 연세가 지긋한 어르신부터 어린 여고생까지 그 발랄한 분위기에 감염되었는지 원장과 도란도란 정담을 나누기 바쁘다. 한의원을 나오면서 서서히 팔을 돌려본다. 옷에서 은은한 한약재의 향이 맡아진다. 팔의 움직임이 조금씩 부드럽다.


정작 문제는 자정 녘에 일어났다. 몸살과 어깨 치료에 피곤했을까. 연이어 하품이 나오더니 눈두덩이 무거워졌다. 초봄이라는 기상청 예보를 들으면서 비틀대며 침대로 향했다. 마침 내일은 일요일이니 늦잠을 청하기로 했다. 포근한 이불의 감촉이 몸을 싸고돈다. 근육의 찌르르한 통증과 한결 편안해진 어깨의 감각이 동시에 느껴졌다.

나는 오른쪽으로 몸을 돌리고 잠을 청하곤 한다. 이날도 떨어지는 동백꽃처럼 오른쪽으로 눕는 순간, 기분 나쁜 기시감이 몰려왔다. 오래 전 느꼈던 불쾌한 감각이었다. 곧이어 천장과 벽이 두루마리처럼 돌더니, 눈을 감아도 빙빙 도는 요지경이 펼쳐진다. 오매~ 어쩌까. 이석이야, 이석증이 다시 찾아왔네. 왜 하는 비명이 절로 났다. 잠시 진정되자 허우적대며 거실로 나갔다.


새벽에 홀로 TV 시청에 빠진 아내가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이석증이 다시 온 모양이야”, “어머. 이를 어째 빙글빙글 돌아? 내일 병원 가야지?” “지금은 멈췄어...” 아내는 이를 어째라는 말을 반복하며 혀를 찼다.

다시금 잠을 청하건만 이석 증세가 무서웠다. 깊은 숙면이란 애당초 포기해야 한다. 새벽 내내 헤매다가 동틀 무렵 일어나서 이석증 자가치료 영상을 검색해 보았다. "좌로 45도 돌린 후 그대로 오른쪽으로 누우세요. 다시 우로 45도 돌리시고 왼쪽으로 누우세요" 영상에 나오는 대로 따라 했다. 좌로 10회, 우로 10회. 핑그르르 살짝 눈이 돈다.


성당으로 가는 길이다. 구름 위를 걷는 듯 살짝 현기증이 인다. 이런 날은 몸과 마음을 조신하게 해야 한다. 무조건 천천히 움직여야 한다. 더 이상 어지럼증이 재발해서는 안 된다. 나는 특별한 일이 없는 주말이면 인근 전남대 커피숍에서 즐겨 찾는다. 오늘도 노트북과 책 한 권을 가방에 넣는다. 나른한 봄을 향해 흔들흔들 걷는다.


부드러운 봄볕이 캠퍼스를 한 폭의 수채화로 꾸미고 있다. 주문한 커피잔을 들고서 이층으로 올라간다. 빈자리에 앉아서 탁 트인 창을 바라보는데 또다시 평행감각이 흔들린다. 미동하는 배 위에 서 있는 기분이랄까. 천천히 노트북을 켜고서 로그인을 한다.


글쓰기는 몰입의 즐거움을 선사한다. 간혹 옆 테이블에서 거친 목소리가 쇳소리로 들려왔지만 개의치 않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기분 나쁜 쇳소리의 음성이 높아진다. ‘공산주의, 윤석렬, 이재명, 통치행위, 젊은 놈들 정신 차려야 해' 등등. 개념 없는 말들이 가자지구에 쏟아지는 이스라엘의 폭탄인냥 귀 에 쏟아진다.

소리의 진원지 확인해본다. 머리가 하얗게 센 올백의 어르신이 거친 말의 진원지다. 맞은편에는 초로의 두 여인이 어설픈 자세로 앉아있다. 그녀들은 올백 노인의 거친 말에 맞서거나 때로는 달래면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올백 할배의 논리는 이렇다. ‘중국인들을 조심해야지, 부정선거를 모른 사람은 없다니까. 계엄은 통치 행위야. 공산주의가 되면 안 돼.’ 듣고 싶지 않은 소음이다. 잠시 후 몇몇 대학생들이 눈을 흘기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귀가 아파온다. 하필 이런 날 집에 이어폰을 두고 오다니 젠장이다. 이석증이 '왜 불러'하며 달려올 것만 같다. “올백 할아버지. 지금 공산주의가 어딨어요. 중국, 베트남, 러시아가 공산국가요? 미쳤네. 지구상에 공산주의가 사라진 것이 삼십 년이 지났다고요.” 거침없이 그에게 소리를 지른다.라는 상상을 해본다. 5.18의 도시에 재림한 태극기 할배라니. 하는 수 없이 회군을 해야 했다. 몸도 마음도 화탕지옥인 채로.


유령은 이길 수 다. 허깨비 공산주의를 박멸하자니 답이 없다. 태극기와 성조기 심지어 이스라엘 깃발까지 흔들면서 욕설과 주먹질해대는 그들의 모습에서 나치의 유겐트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어쩌면 이들은 영혼 없는 좀비거나 유령일지도 모르겠다. 이럴 때 원 펀치 마동석이 나타난다면 좋겠다.

이런 와중에도 글 한 편을 완성한 것은 다행이다. 이석증만으로도 돌 것만 같은데, 태극기 올백 할배의 쇳소리 까지라니, 귀에서 피가 흐를 것만 같다. 몸도 돌고, 세상도 돌고. 어지러워서 화병이 날 지경이니 불쌍한 내 몸에게 선물을 해야겠다. 기력 빠진 육신을 따끈한 욕조에 푹하니 담근 후, 재미있는 영화 한 편을 내려받아기로 한다.


오래전에 보았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선택한다. 유령 마을에서 사라진 엄마와 아빠를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치히로가 생각난다. 영화 구매 버튼을 누른다. 빙빙 도는 어지러운 세상을 해결하는 묘법은 무엇일까? 스멀스멀 다가오는 어지러움을 바라보면서 밝아오는 화면을 응시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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