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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신호 Dec 23. 2021

눈 오는 날에는 '아델'

 <Someone like you>, 아델

#1

지하차도에 막 접어들었다. 점심시간에 짬을 내서 직장에서 가까운 처갓집으로 가는 길이다. 출근할 때 아내가 낮에 시간 나면 우산동에 가서 쌀을 가져와 달라고 했다. 장모님은 자식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무쏘의 뿔처럼 농사를 지으신다. 작고 구부정한 몸으로 자식들 삶에 도움을 주려는 마음을 알기에 감사하다. 어쩌면 무작정 하지 말라는 것도 불효일 수 있다. 잘 받고, 감사하는 것이 바른 도리라는 생각도 든다.  

   

  아침부터 하늘이 잔뜩 찌푸리더니 바람이 차츰 불기 시작했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어깨를 웅크리며 식당에서 나왔다. 이젠 빗방울이 더하고 있었다. 처갓집까지는 대략 15분 정도 걸린다. 얼마 전부터 직장 근처, 지하차도에서는 공사가 시작되었다. 이때문에 한 차선이 잠식된 터라 운전에 신경이 곤두선다. 달리는 차와 공사장 사이로  안전띠를 착용한 인부들이 오가고 있다.     

  느린 속도로 주행을 한다. 안전모를 쓰고 고개를 떨구며 조심스레 걷는 인부가 보인다. 그는 내 차를 피해서 공사 현장 경계표지 옆으로 바짝 붙는다. 얼핏 보니 잘생긴 외국인 노동자이다. 아랍인 아니면 인도인인가?’라는 생각을 해본다. 가족의 생계를 위하여 머나먼 이곳까지 와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이다. 뒤로 멀어져 가는 그를 다시 한번 힐끗 거울로 쳐다본다. 내 마음이 갑자기 외로워진다.     



#2

  지하차도를 지날 무렵, 비가 점차 눈으로 바뀌고 있다. 와이퍼를 작동한다. 아델의 CD를 플레이어에 넣는다. 그녀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I heard that you're settled down, That you found a girl and you're married now”(네가 자리 잡았다는 소식은 들었어, 이제 결혼한다고 너의 꿈이 이루어졌다고 들었어) 아델의 목소리는 쉰 듯 서글프다. 노랫말 때문인지 오던 길에서 보았던 그 외국인 노동자가 떠오른다.    

  

  처갓집이 보인다. 장모님이 우산을 쓰고 기다리고 있다. 박 서방, 바쁠텐데 어서 가져가소. 계단에 쌀 두 포대가 있네라고 말씀하신다. 쌀 포대를 싣는다. 감사합니다. 추운데 어서 들어가세요라는 말과 함께 출발하려는데, 잠깐만 있어 보란다. 깜박했다며 양파와 미숫가루도 챙겨주신다. 다시 차에 시동을 켠다.

 

  눈이 소심하게 내린다. 장모님의 구부정한 뒷모습이 시야에서 멀어져간다. 자식의 짝을 보는 장모님의 마음은 어떠할까? 잘 헤아려지지 않는다. 인생이란 살아가면서 깨닫는 과정인 모양이다. 장모님께서는 지금도 나를 가끔 어려워하시는 것 같다. 백년손님이기 때문일까?      

#3

  여러 해 전, 장모님은 혼자가 되셨다. 그 후 장모님은 마을 노인회장을 장기 집권했고, 직장 일로 바쁜 처제를 대신해서 오랜 기간 외손주를 돌보았다. 물론 논농사도 놓지 않으셨다. 그 덕분에 자식들은 가을이면 윤기 흐르는 햅쌀을 먹을 수 있었다.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잔 날 없다는데, 요즘 들어 장모님은 구부정한 나무처럼 힘겹게 보인다. 장모님의 겨울이 조금은 따스하면 좋겠다. 내리던 눈이 제법 굵어진다. 


 다시 아델의 <someone like you>를 들으면서 직장으로 돌아간다. “Never mind, I'll find someone like you I wish nothing but the best for you two” (아니야, 그냥 너 같은 사람을 찾을게, 너희 둘이 잘 되기만을 빌어) 눈의 양에 비례해서 와이퍼가 분주해진다. 눈 내리는 날, 그녀의 곡조가 서글프게 들리다니 갱년기임이 분명하다. 와이퍼를 이리저리 피한 눈송이들이 유리창 모퉁이에 쌓여간다.

   

   

#4

 다시 지하차도 방면으로 들어선다. 눈 속에서 인부들은 일하고 있다. 아까 보았던 외국인 노동자도 보인다. 그는 플라스틱 배관을 옮기고 있다. 잠시 차가 정체된 덕에 그들을 좀 더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대부분이 외국인들이었다. 더운 나라에서 살았던 피부색인데, 추운 겨울, 내리는 눈 속에서 코리아 드림을 꿈꾸며 일하는 그들이 안쓰럽다.      


 외국인 노동자들은 허름한 숙소에서 함께 지낸다고 한다. 문득 지하차도에서 일하는 그들이 하얀 눈을 볼 때면 어떤 감성이 되는지 궁금해진다. 고향에 있는 가족이 그리워질까? 아니면 추위에 힘겨워하며 깊은 잠에만 취할까. 어쩌면 눈을 처음 보는 이도 있을 것이다. 마음이 애틋해진다. 눈사람이 되어가는 그들에게 이런 호기심을 갖다니 죄스럽다. 점차 정체가 풀려간다. 그들이 작업을 중단하더니 사라져간다. 눈 때문에 작업이 멈춘 것이다. 운전하던 내 손도 편안해진다.     


 힘들게 일하는 외국인 남편이자 아빠를 만나기 위해서, 그의 가족이 우리나라를 찾아오는 방송을 본 적이 있다. 그 외국인의 아내와 아이들은 자신들을 위하여 열심히 일하고 있던 아빠에게 깜짝 등장한다. 그 뒤를 말해서 뭐 하랴. 서로에게 선물인 그들이 껴안고 울 때면, 내 눈도 욱신거렸다. 사장에게 욕을 먹으면서도 애써 일하고, 아꼈던 월급을 가족에게 통째로 보내는 그들의 삶은 경건하다.      


#5

 오후 일과 시작 전에 겨우 도착했다. 트렁크를 열고 쌀 포대를 바로잡는다. 내일부터는 장모님이 주신 햅쌀로 식구들은 맛있는 식사를 할 것이다. 어느새 허공에서 눈이 내렸다, 멈췄다를 반복한다. 오늘 밤, 그 외국인 노동자가 꿈속에서라도 가족을 만나게 해달라고 그분께 나지막이 속삭인다. 아델의 노래가 귓가에 맴도는 눈 내리는 날이다.



I heard that you're settled down 네가 자리를 잡았다는 소릴 들었어

That you found a girl and you're married now  그리던 여자도 만나고 결혼도 하고,

I heard that your dreams came true 네 꿈도 이뤘다는 것도 말야

Guess she gave you things I didn't give to you 아마 그녀가 내가 네게 주지 못한 것을 준 모양이구나

Old friend 저기.. 친구야 / Why are you so shy?  왜 어색해 하고 그래            


I'd hoped you'd see my face 네가 날 바라봤음 했었고

And that you'd be reminded that for me it isn't over   

나한텐 우리가 아직 끝난게 아니라고 네가 생각해 줬음 했었어

Never mind I'll find someone like you (방금 한말은)신경쓰지마, 너를 닮은 사람을 찾을테니까.

I wish nothing but the best for you too 나도 네가 잘 되길 바랄 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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