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리를 옮겼다. 벌써 네 번째다. 처음 좌석은 노곤한 광선이 고여 있어 마딱치 않았으나 다른 자리가 보이지 않았다. 별수 없이 그곳에 가방을 내려놓고 카운터로 향했다. 주문한 딸기 요거트를 받아 들고서 위층에 갔더니 빈자리 하나가 눈에 띄었다. 입구이라서 잠시 주저했으나 그늘의 농도가 맘에 들었다. 곧장 자리를 옮긴 후 시큼 달콤한 요거트를 음미하는데 맑은 창가 테이블에 있던 안경 쓴 젊은이가 일어난다.
그곳은 가로수가 넉넉하게 보이는 투명한 창가다. 그 정도라면 책을 볼 수도, 글도 쓸 수 있겠다 싶었다. 자리를 이동했고 마음은 아늑해졌다. 나는 느긋하게 다리를 꼰 채 김애란의 <달려라 아비>를 펼쳤다. 다 읽어갈 무렵. 이번에는 공간 깊은 곳에서 노트북 작업을 하던 여학생이 짐을 챙겼다. 그 자리는 콘서트가 부착되어 노트북을 사용하기에 좋은 곳이다. 또 옮겨? 말어? 가방을 둘러 매고서 기꺼이 디아스포라를 택하기로 한다.
문득 대학 시절, 빈좌석을 찾아 열람실을 헤매던 메뚜기의 신세가 떠올랐다. 잦은 이동 탓에 남들 시선이 의식된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카페 분위기가 산만해서 눈치 의식하지 않고 자리를 바꿀 수 있었다. 여기는 ‘별다방’ 스타벅스이다. 우리 동네 별다방은 늘 붐볐고 항상 시끄러웠다. 그래서일까?스타벅스는 가까이 하기엔 먼 당신이었다.
며칠 전 스승의 날. 졸업생이 두고 간 메모와 귀여운 봉투가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뭔가 싶어 열어보니 초록색 카드가 들어있다. 스타벅스 이용 카드였다. (혹시 김영란법에 저촉되는 것은 아니냐고요? 너무 시린 눈으로 보지 마시길.) 카드에는 여러 잔의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금액이 충전되어 있었다.
일단은 카드를 등록해야 했다. 문제는 스타벅스 카드 등록이 최상급 난이도란 점이었다. 결국 아들에게 부탁했지만 녹록지 않은 공정과정 거쳐야 했다. 그야말로 난산이었다. 가입, 이름, 생년월일, 번호입력. 동의여부, 통신사, 인증번호 및 pin번호 입력, 번호 오류입니다 등등. 내 입에선 젠장, 망할, 빌어먹을 따위의 단어가 연이어 나왔고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떠올랐다.
커피 한 잔 마시는 것이 이토록 어렵다니. 그냥 김양, 박양이 껌을 씹으며 가져다주던 다방 커피가 그리워졌다. 가까스로 등록을 마쳤다. 참, 별난 별다방이야. 오만 원이란 숫자가 적혀있는 액정화면에는 지문 자국이 고난찬 행군의 증거물로 남겨져 있었다.
알다시피 스타벅스 로고는 푸른색의 여인이다. 그녀의 이름은 사이렌. 서사문학 <오디세이>에 등장하는 괴물 이름이다. 살짝 미소를 짓고 있는 괴물. 외딴섬에서 달콤한 노래로 뱃사람들을 유혹한다는 사이렌. 여기에 걸려들면 백골 신세임을 피할 수 없다. 하긴 스타벅스 매장도 사이렌의 노래처럼 유혹적이고 요란하니 닮은 꼴이라 하겠다.
스타벅스를 싫어하는 까닭을 생각해 본다. 자본주의의 첨병이자 상징이란 반감? 이런 이유로 싫어할 만큼 투철한 반자본주의자가 아니다. 일단은 터무니없는 가격이 비호감이다. 한 잔 값이 짜장면 한 그릇 값이 아닌가. 의자와 탁자도 내 취향이 아니다. 결정적으로 별다방은 시끄럽다. 우리 동네 매장만 그런가 싶긴 하지만. 커피 내리는 소리, 주문받는 아르바이트생의 들뜬 음성, 성량 조절 없는 수다와 정체불명의 음악들까지.
내가 사랑하는 카페는 넓은 하늘이 보이고 나무가 즐비해 서있는 그런 곳이다. 부드러운 햇볕 아래 야외 테이블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남녀들. 혼자 책을 보아도 눈치 볼 필요 없이 편한 곳. 패티스미스나 프란시스 아르디 노래가 깔린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말끝마다 “예 고객님”을 외는 유니폼의 아르바이트생이 없는 것도 괜찮다. 나이 지긋한 주인이 미소를 지으며 종이 필터에 커피를 내려주는 그런 카페를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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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여 년 전. 경북 봉화 청량산으로 순례를 떠났다. 교사불자 일행으로 청량사와 퇴계 이황의 흔적을 찾아 나선 길이었다. 청량정사까지 가던 산길에서 마주친 허름한 찻집이 기억난다. 쌀쌀한 겨울 산바람을 피해 들어선 그곳은 카페와 동네 슈퍼마켓이 적당하게 조합된 휴게실이었다. 말과 동작이 느린 초로의 찻집 주인장은 우리에게 따끈한 한방차를 따라주었다. 잔을 두 손으로 잡고서 후후 입바람을 불면서 마셨던 한방차와 고구마. 창밖으로는 풋풋한 산 내음과, 새소리. 그곳은 자비송이 고운 선율로 흐르고 있었다.
제주도 7번 올레길은 바다를 옆에 끼고 걷는다. 겨울이건만 오후 햇살은 순했고 하늘과 바다는 한빛이었다. 세 시간가량 걸음을 옮기다가 바다가 보이는 높은 해변 언덕에 서있는 컨테이너가 보였다. 노란색 벽면과 바람개비가 도는 붉은 기둥이 인상적인 작은 카페였다. 젊은 여인이 ‘어서 오세요’ 일행을 맞이한다. 우리는 주문한 커피를 마시며 마당에 있는 의자에서 바다를 바라보았다. 붉은 기둥에 달린 스피커에서는 이중창 <저녁 산들바람은 부드럽게>가 나오고 있었다. 따스한 커피와 수정빛의 바다. 포근한 겨울 햇살까지. 그 순간은 완벽한 천국. 속세의 근심 따위가 명함을 내밀 수 없는 완벽한 세상이었다.
별다방을 나왔다. 거리엔 땅거미가 깔리고 있다. 여기저기 걸려있는 선거 현수막들이 흉물스럽다. 어쩔 수 없는 속세의 소음이다. 사이렌 괴물이 스타벅스 밖에도 서성대고 있나 보다. 이럴 땐 귀를 꽉 막고 살아야 한다. 괴물이 내 안에 들어오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