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이라마 친견은 나의 버킷리스트 1호다. 하지만 존자님의 방한이 난망하니 티베트 망명지 다람살라에 가야만 뵐 수 있을 것이다. 과연 그런 날이 오는지 알 수 없지만 염원한 바 오래되었다. 대신 수십 년째 다람살라에 머물면서 달라이라마 곁에서 수행하신 청전스님의 책과 영상 법문으로 아쉬움을 달래곤 한다.
한 달 전. 보성 대원사에서 ‘청전스님과 함께하는 템플스테이’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언젠가 한국에 오신 스님께서 강원도 영월에 계신다는 풍문을 듣고서 가볼까 궁리까지 했던 터라, 가까운 대원사에 오신다고 하니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게다가 천봉산 대원사는 아버님의 혼백이 쉬고 있는 각별한 사찰이 이니던가.
참 수행자를 만날 볼 수 있다는 기쁨으로 법회 날짜를 손꼽으며 기다렸다. 그것은 달라이라마 존자님을 향한 그리움이기도 했다. 티베트에 대한 내 사랑은 진심이다. 중국의 침략과 숱한 희생, 달라이라마의 망명과 그의 노벨평화상 수상. 티베트 불자들의 오체투지 순례 등은 감동이었다. 한없는 자비 실천을 강조하는 존자님은 화탕지옥에 피어난 한 떨기 연꽃이었다.
호사다마(好事多魔). 법회 전날, 내 스마트폰이 스미스 피싱에 노출된 바람에 심사가 소란스러웠다. 피해를 방지하고자 계좌 폐쇄와 스마트폰 초기화, 경찰서 방문 등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면서 자칫 청전 스님과의 만남이 어려워지나 싶었다. 그저 인연에 뜻을 내맡기자며 마음을 다독였다.
오늘은 기다렸던 법회일이다. 하늘은 잿빛으로 흐리고 여름을 재촉하는 굵은 비가 내린다. 마침 약국 형님 부부와 약속했기에 부리나케 차를 몰았다. 창밖에 비친 십리 벚꽃길과 지석천도 빗물에 젖어 있다. 대원사에 도착해서 법회 장소인 어린왕자 선문학관을 향해 발을 옮기는데 멀리서 약국 형님과 리디아가 손을 흔드는 모습이 보인다. 가톨릭 신자인 형님은 근래 여러 차례 성지 순례를 혼자서 다녀올 만큼 마음이 맑은 분이다.
어린왕자 선문학관에 들어선다. 어린 왕자와 불교사찰이라... 낯선 조합이다. 법정 스님의 <어린왕자> 사랑은 널리 알려져 있다. 무려 사, 오십 차례 읽었다 하니 스님에게 <어린왕자>는 경전이었나 보다. 대원사 주지 현장 스님과 법정 스님은 세속의 삼촌과 조카 관계라고 한다. 아마도 이런 인연으로 대원사에 <어린왕자> 선문학관이 설립되었으리라 짐작해 본다.
빗소리가 정적을 채우는 어린왕자 선문학관에 들어선다. 무대에는 청전스님 초청 테플스테이라는 플래카드가 걸려있다. 행사 시작까지는 여유가 있어 선문학관 여러 공간을 둘러본다. 약국 형님 부부도 사이좋게 다니고 있다. 패티 페이지와 카펜터스 노래 선율이 잔잔하게 흐른다. 절집에서 듣는 추억의 팝 음악이 신선하다.
빈 좌석이 참석자들로 채워지고 있다. 주지 현장 스님의 얼굴도 보인다. 한데 자세히 보니 손을 떨고 계신다. 인사를 드리자 스님은 떨리는 손을 흔들며 “오랜만일세”라며 반가워하신다. 스님은 보행할 때도 몸을 떨고 계셨다. 언제나 유쾌하고 건강한 분이었는데 마음이 울적해진다.
드디어 청전 스님이 합장하며 들어오신다. 참석자들도 두 손을 모아 인사를 드린다. 잠시 후 현장 스님이 불편한 몸으로 무대 올라오더니 유머스럽게 청전스님을 소개한다. 상. 하체 모두 떨고 있건만 스님 얼굴과 행동은 여전히 상쾌하다. 병든 육신임에도 불구하고 여여한 미소를 짓고 있는 현장스님을 유심히 바라본다. 나도 저런 경우를 당해도 의연할 수 있을까 싶다. 스님의 떨리는 몸에서 가르침을 받는다.
청법가 대신 티베트 전통 피리 연주로 법회가 시작된다. 피리 가락이 마음을 고요하게 만든다. 공간 가득 티베트 피리 선율로 채워진다. 연주가 끝나자 청전 스님이 입을 연다. 스님에게서 풍기는 형형한 아우라와 눈빛, 유달리 길어 보이는 손가락의 움직임까지 눈에 들어온다. 스님은 달라이라마 존자와 인연을 맺었던 세월과 카르마파 존자의 중국 탈출 과정, 카알리스 순례 등 수행 생활 이모저모 들려주신다.
법회의 마무리는 단체 사진 촬영이다. 진행자가 공양간으로 이동을 안내한다. 밖에 나와보니 빗줄기가 더욱 강해졌다. 다들 우산을 쓰고서 오종종 공양간으로 향한다. 이날의 메뉴는 카레다. 서둘러 식사를 마친 후 형님과 리디아에게 인사하고서 잰걸음으로 주차장으로 향한다. 한 시간 뒤 광주에서 글사랑 모임이 있기 때문이다. 가는 길이 급하다.
늦은 저녁, 집에서 들어와서 한숨을 돌린다. 길다면 긴 하루였다. 자리에 앉아 묵상하는데 청전 스님보다 떨리는 몸으로 대중을 맞이하던 현장스님과 성지 순례 속에서 주님을 찾는 신실한 약국 형님. 고된 시절을 이겨낸 착한 리디아의 모습도 생각난다. 언젠가 스승을 만나는 복이 제일 크다는 말을 들었다. 문득 주변의 선한 벗들이 나의 스승이 아닌가 싶다. 굳이 다람살라나 강원도 영월을 찾지 않아도 진리의 스승은 여러 모습으로 나투고 있음을 깨닫는다.
“畫角聲中朝暮浪 [화각성중조모랑] 뿔피리 소리 요란한데 아침저녁이 파도처럼 출렁이네.
靑山影裏古今人 [청산 영리 고금인] 푸른 산의 그림자 속에 한결같은 사람이 있도다.”-최치원
푸르른 눈으로 세상을 보았던 최치원의 마음자락이 엿보인다. 그가 찾고자 했던 한결같은 사람은 누구일까. 달라이라마, 청전과 현장, 약국 형님과 리디아. 이 모두에게 임하고 있는 순수한 존재. 그가 한결같은 사람, 바로 스승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