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일 불볕더위다. 도심의 열기를 피해서 계곡이나 바다에 가면 좋으련만 여의치 않다. 이럴 땐 시원한 음악을 듣는 것도 피서의 한 방법이다. 낸시 시나트라의 <썸머 와인>이나 진추하의 <원 썸머 나잇>도 좋지만, 높은 습도에 지친 마음까지 말랑말랑하게 만드는 등려군의 <월량대표아적심>이 으뜸이다.
대륙의 여신 등려군의 목소리는 바람에 살랑대는 버드나무 가지처럼 고혹적이다. 그녀는 본토와 대만, 홍콩을 포함한 중화민족의 연인이다. 1980년대 ‘낮에는 등소평, 밤이면 등려군’이란 말이 있었다고 하니 그녀의 인기가 짐작된다. 더운 여름 <첨밀밀>, <야래향>, <하일군재래> 등 그녀의 주옥같은 노래와 함께라면 열대야마저 달콤하다.
엊그제 저녁. 여명, 장만옥 주연의 영화 <첨밀밀> 다시 보았다. 아내는 후덥지근한 날씨도 아랑곳 없이 청소 삼매 중이거늘 나는 팔자 좋은 베짱이가 되어 등려군 노래와 장만옥에 넋을 잃은 채 오붓한 여름밤을 만끽했다. 장만옥의 연기는 압권이었다. 임청하의 카리스마, 왕조현의 야릇함도 없건만 장만옥은 그녀만의 매력으로 한 시절을 풍미했다. 왕가위 감독의 <화양연화>에서 보여준 장만옥의 우수에 젖은 눈빛과 우아한 자태는 고혹미의 절정이었다.
홍콩 영화의 역사는 이소룡에서부터 시작된다. 검은 줄무늬 노란 운동복과 야홋! 솔 음의 괴성, 강력한 격투 장면과 휘두르던 쌍절봉은 브루스 리(이소룡)의 랜드마크였다. 그가 남긴 영화는 5편에 불과하지만 뜻밖의 사망으로 전설이 되었다. 이소룡이 사라진 허전함은 술 취한 소호자와 성룡의 코믹 권법이 채워주었다. 나의 고교 시절, 홍콩 영화는 웃음 폭탄이었으니 <최가박당>과 강시가 뛰어다니는 <귀타귀> 덕분에 월말고사의 후유증을 견뎌냈다.
나와 친구들은 미래 로봇과 싸우는 할리우드 영화 <터미네이터>보다 이연걸의 <황비홍>과 임청하의 <동방불패>를 더 사랑했고 서극 감독의 무협 영화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은 채 극장으로 달려갔다. 거리에서의 집회가 끝나면 최루탄을 씻고서 골목길 비디오 집에서 빌렸던 <천년유혼>. 그 비디오 테이프는 괴물과 선녀, 여자 귀신, 남자 귀신들이 돌아다니는 환상의 세계다. 세상은 영화 E.T와 마이클 잭슨의 문워크에 열광했고 국내 영화는 배우 안성기가 12척만으로 왜적을 무찌른 이순신처럼 할리우드와 홍콩 영화를 상대로 분전하던 시대였다.
대학을 졸업했고 손해보험회사 보상과 직원이 되어 서울로 신입사원 연수를 받게 되었다. 연수 과정 중에 인체 해부도와 뼈의 위치를 암기할 때는 내가 의대생인가 싶었다. 아무튼 사회는 만만치 않았다. 눈치와 억지와 월급의 거룩함을 배우면서 퇴근 시간을 기다렸던 것은 애인이 아닌 영화 때문이었다. 해 질 녘이면 주윤발의 <영웅본색>과 유덕화의 <천장지구>를 찾아서 현대, 무등, 태평, 아카데미, 계림 극장으로 향했다.
어둠을 더듬거리며 들어선 극장에는 비열한 갱단과의 비장한 사내들이 총격전을 펼치고 있었다. 선글라스에 긴 코트를 입은 비정한 그들이 “닥커(형님)”를 외치며 정의로운 피를 토하면서 쓰러졌다. 주윤발이 뿜어대는 담배 연기는 왜 그리 멋있던지. 그렇게 비장하고 비정한 영화가 끝나면 나는 주윤발처럼 담배를 물고서 충장로와 금남로를 활보했다.
이런 저런 곡절을 거쳐 국어 교사가 되었다. 학교는 닫힌 공간이자 에고의 한마당이다. 하루는 찌질했고 업무와 학급 관리는 영혼 없는 알고리즘의 반복이었다. 당시 왕가위 감독은 나의 메시아였다. 홍콩 스타들이 총출동하다 싶었던 <중경삼림>에는 마마& 파파스가 <캘리포니아 드리밍>을 노래했고, <아비정전>에서 장국영은 맘보 리듬에 맞춰 춤을 추었다. 하지만 본토 반환을 앞둔 홍콩 영화는 점점 비루해졌고 스크린에서 빛나던 별들이 헐리우드로 떠나갔다.
베이징 하계 올림픽 개막 며칠 전. 나는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몇몇 지인들과 홍콩을 찾았다. 이 무렵 홍콩 영화는 서산에 지는 태양 신세였다. 오직 도끼파 주성치, 소림축구 주성치가 버티고 있었다. 여행 사흘째, 스타의 거리에 도착했을 때는 비를 품은 먹구름이 하늘에 가득했다. 바닥에는 성룡, 양조휘, 장만옥, 임청하, 관지림, 홍금보 등의 핸드프린팅이 새겨져 있었다. 그곳에 손바닥을 맞대면서 그들을 추억했다. 그날 밤 장국영이 뛰어내렸다는 고층 빌딩을 올려다 보면서 첸카이거 감독의 <패왕별희>를 생각했다.
'홍콩 간다'란 말은 성적 쾌락의 은유다. 그때의 청춘들은 홍콩 영화사 골든 하베스트의 붉은 마크와 웅장한 시그널 음향이 울리던 극장에서 홍콩으로 뽕하니~ 갔다. 오늘날 홍콩 시민들은 본토의 억압에 맞서 노란 우산을 펼치며 자유를 외치고 있으니 구룡반도 저무는 구름이 아련할 따름이다.
이제는 마오 주석도 등소평 군사위원장도 장쩌민 서기장도 없다. 그리고 "하일군재래" 그대는 언제 오시냐며 노래하던 등려군도 없다. 세기말 불안했던 우리를 위로했던 홍콩의 별들이 그리워진다. 하여 오늘 밤에는 임청하와 장만옥이 나오는 서극 감독의 <신용문객잔> 보련다. 모래바람을 뚫고 칼날을 겨루던 그녀들을 만나면 기쁘겠다.
열대야가 기승인 밤이다. 피할 수 없는 열기를 만날 때면 차라리 등려군의 나긋나긋한 노래에 취하길 권한다. 홍콩 영화를 만나는 여름 저녁이라니... 니하오마, 홍콩이여 좋은 시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