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숨 쉬는 이 시간은 나를 어디로 데려갈까. 많은, 기쁨과 한숨이 뒤섞인 이곳에서~" -룰라, < 3! 4!>
환갑 나이에 담임을 맡았다. 그것도 고 3학년을, 덤으로 학년부장까지. 그것은 골인 지점이 가까운 마라토너에게 5km를 더 뛰어야 한다며 다그치는 날벼락과 같았다. 간혹 고3 진학부장 모임에 가면 원로 대접을 받는데, 한 번은 모 대학교 입학처장이 내 나이를 묻더니 골동품이라며 감탄했다. 귀하다는 뜻인지 쓸모없다는 뜻인지 아리송했으나 그러려니 여길 뿐이다. 생활인은 그래야 하니까.
명퇴와 정년을 저울질하는 가운데 친했던 선배 한 분이 퇴임했다. 그는 전별 행사를 마다하고 시간이 날 때마다 꾸려두었던 짐을 들고 홀연히 교문을 나섰다. 몇 해 전부터 퇴임 후 준비를 알차게 하던 선배였지만 퇴임 날짜가 가까워지자 설명할 수 없는 쓸쓸함, 허무함, 불안감이 얼굴에 읽혔다. 나는 생활의 일선에서 전역하는 노교사인 그에게 선뜻 축하한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머잖아 나 또한 같은 처지가 될 것임을 아는 까닭이다.
삼십 년 전 직장에 만났던 동료들 가운데 남은 이는 두 명 정도이다. 친했건, 존경했건, 미워했던 간에 떠나간 이들의 빈자리가 보면서 인생은 무상한 것이라고 되뇌었다. 물론 그 빈자리는 빛의 속도로 새 얼굴들이 채우고 있었다. 가끔 몇몇 퇴임 선배들과 연락해 보면 다들 바쁘다고 한다. 정말 그런 것인지, 바쁘고 싶다는 반어법인지 눈치껏 헤아려 보곤 했다. 작년에는 몇 해 전 퇴직한 선배들의 연이은 부고 소식을 잡고서 삶의 시간이란 참으로 초라하구나 싶었다.
삼십 년 전 학원 강사 시절이었다. 출근은 오후 두 시, 퇴근은 새벽 한 시였다. 특별반 심야 수업이 끝나면 학원 버스를 타고서 퇴근했다. 새벽녘의 도심은 한가했고 거리의 가로등도 하품하는 듯 나른한 빛을 토하고 있었다. 어둠을 가르고 달리는 퇴근 버스에는 당시 대세인 룰라의 <3! 4!>와 듀스 댄스곡이 자주 나왔다. 새벽 시간에 집으로 향하는 학원생들을 위한 기사님의 선물인 셈이었다.
심야 수업까지 마치고 버스에 오르면 몸은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고 눈은 절로 감겼다. 다만 귀는 열어둔 채 흥겨운 룰라와 듀스의 음악에 맞춰 발을 끄덕이곤 했다. 특히 새벽 학원 버스에서 들었던 룰라의 <3! 4!>는 지금껏 희망과 위로의 곡으로 기억되고 있다. 대학 졸업 후 갈팡질팡하던 취업과 전업으로 나는 불안했고 결혼 후 첫애가 태어났을 때도 안개와 같은 상황은 여전했다. 늦은 저녁까지 이어지는 하루 8시간 이상 학원 수업은 내 삶의 최전선이었다.
새벽 퇴근길 차 안에서 들려오는 <3! 4!> 노랫말 도입 부분을 들이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했었다. 가령 "여기 숨 쉬는 이 시간은 나를 어디로 데려갈까"에서는 좀 더 나은 미래를, "기쁨과 한숨이 뒤섞인 이곳에서~"가 나올 때면 괜스레 나의 현실을 푸념하는, 이런 식으로 말이다. 아무튼 룰라의 채리나 목소리는 묘하게 또 다른 세상을 상상케 했다.
룰라는 <날개 잃은 천사>로 당시 가요의 최정상에 올랐으나, 다음 해 발표한 <천상유애>가 표절곡으로 밝혀져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렇게 롤러코스터를 타던 룰라가 심기일전하듯 내놓은 곡이 <3! 4!>였다. 그런 까닭으로 내게 <3! 4!>는 패자를 위한 부활의 노래로 들려왔다. 이 노래 이후 룰라에 대한 기억은 희미하다. 노래 잘하고 고혹적이던 싱어 김지현이 탈퇴하더니 거듭된 멤버 교체 속에서 룰라는 사라졌다.
대신 멤버들의 풍문은 가십거리로 무성하게 넘쳐났다. 리더 이상민은 한동안 연예기획 사업에 하다가 수십억 원의 빚을 졌고, 김지현은 애로영화에 등장하더니 난감한 성형 얼굴로 남성팬들을 실망케 했고, 고영욱은 교도소까지 갔으니 룰라는 진짜 날개를 잃은 천사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리더 이상민은 그 무지막지한 빚을 고난 끝에 기어코 청산했다고 하니, 인생 3전 4기의 진수를 보여준 셈이다. 이제는 지천명의 나이가 된 댄스 그룹 룰라는 열린 음악회에서 가끔 볼 수 있으니, 머잖아 가요무대에서 그들의 <3! 4!>를 듣게 될 것 같다.
엊그제 직장 후배가 내게 "이제 왕고(왕선임)입니다."라고 했다. 이 또한 좋은 의미인지 퇴직 순서를 알려주는 것이지 아리송하지만 그런 인생의 계절이 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이번에 퇴직한 선배가 떠난 빈 공간을 둘러보면서 나의 마무리를 생각해 본다. 함민복 시인은 ‘모든 경계에서 꽃이 핀다’고 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럴듯하다. 명퇴와 정년, 재직과 퇴직이라는 불안정한 경계에서 예쁜 꽃 한 송이가 피어나기를 소망할 따름이다.
오늘도 어느 직장, 어떤 일터에서 자신의 짐을 들고서 마지막으로 직장 문을 나서는 퇴직자들이 있을 것이다. 노후 대비로 불안한 그들의 처진 어깨를 향해서 룰라의 <3! 4!>를 들려주고 싶다. 부디 3전 4기 하라고. 생활인은 그래야만 하니까. 나도 그래야 하니까.
“서로가 함께 영원히 행복하도록, 나 그대 우리 모두 아파한 시간만큼 기쁨을 만들어가요. 나의 그 모든 눈물만큼 사랑을 만들어가요.” 룰라-<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