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의 85일

<노인과 바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by 박신호

이글거리는 카리브해의 태양보다 뜨거웠던 사내. 어니스트 헤밍웨이. <노인과 바다> 표지에 나와 있는 그의 사진을 본다. 부리부리한 눈, 다부진 입술, 굵은 목덜미까지 영락없는 태양인이다. 그는 1차, 2차 세계대전을 전장에서 몸소 겪었으며, 스페인 내전 당시에는 혁명군에 가담했던 현장의 작가였다. 대표작 <무기여 잘 있어라>와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는 그가 참전했던 노르망디 상륙과 파리해방 전투, 카탈루니아 지방에서의 역경을 바탕으로 한다.


“헤밍웨이가 미국 문학에 남긴 유산은 그의 문체다.”라는 말이 있듯이 그의 필력은 정평이 나있다. 작가를 꿈꾸는 이라면 <노인과 바다>가 오백 번에 가까운 퇴고의 산물이란 말을 한번쯤은 들었을 것이다. <무기여 잘 있어라>의 첫 부분은 50번, 끝부분은 39번 넘게 퇴고했다고 한다. 그의 작가 정신은 그의 삶만큼이나 치열했음을 짐작케 한다. 평론가들은 그의 문체를 가리켜 가독성이 뛰어난 글이라고 한다.


<노인과 바다>는 대학 시절에 읽었으니 실로 사십 년만의 재회였다. 그때는 자연과 대결하는 불굴의 인간 투쟁기 정도로 이해했다. 하지만 다시 만난 <노인과 바다>는 내게 전혀 다른 감동을 선사했다. 그것은 고전의 힘이기도 했다. 스무 살 시절에는 산티아고 노인에게 감정을 이입하는데 한계가 있었던 모양이다. 반면 이번에는늙은 어부 산티아고의 마음이 보이기 시작했으니, 그것은 장년과 노년의 갈림길이 준 혜안이 아니겠는가.


여든 나흘 동안 한 마리 물고기도 잡지 못했던 늙은 산티아고는 젊은 어부들의 조롱 대상이었다. 84일 동안 빈 그물로 귀가하는 그의 처지는 딱했건만 해가 솟는 아침이 되면 어김없이 돛을 매고 나타나 작은 배를 타고서 바다로 나갔다. 그에게 고기잡이는 소명이었다. 한 인간이 결과를 떠나서 무언가를 꾸준하게 반복한다는 것은 위대한 미덕이다. 그것은 허무함을 이겨내는 삶의 도리이기도 하다. 마침내 소명과 같은 무던한 반복이 85일째 되던 날 엄청난 녀석을 조우케 한다.


아침 일곱 시 오 분은 내가 집을 나서는 시간이다. 정년이 2년 가량 남았으니 산티아고 노인과 비슷한 처지라 할 수 있는데, 금년들어 3학년 부장과 담임을 맡으면서 왕고참의 모범(?)을 보이는 중이다. 과거 퇴직가까운 선배들이 업무 없이 한들한들 지냈던 것을 생각하면 기가 막힌 노릇이다. 오래 전 ‘일 복이 많다’는 말을 들어서 불쾌했는데 이또한 내 팔자련가 싶어진다. 신포도를 포기했던 여우처럼 일복도 복이라며 내 자신를 위로한다. 아무튼 매일 반복하는 일상 속에서도 은근히 기대하는 것은 산티아고가 85일 째 마주했던 거대한 청새치. 내 생에 조우해야 할 영혼의 청새치이다.


산티아고 노인의 삶은 순응이다. 연일 물고기를 못 잡을 때도, 700kg짜리 청새치가 상어에게 뜯겨 앙상한 뼈만 달고서 포구에 돌아와서도 전혀 분노하거나 불평하지 않는다. 젊은 어부들이 업신여길 때도 얼굴 붉히지 않는다. 무려 5.5미터에 이르른 청새치와의 뜨거운 투쟁도 말하지 않는다. 그는 우리에게 자존감 끝판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삶에 충실한 자는, 진리에 따라 살아가는 이는 구구절절 설명하는 법이 없다. 다만 운명이 이끄는대로 묵묵하게 따를 뿐. 노인의 하루는 수행자의 순명을 닮았다.

내가 업무를 보는 진학실에는 후배 교사들이 자주 놀러 온다. 아랫층 교무실보다 편안하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질 좋은 커피가 구비되어 있고 여러 대학이 입시 홍보용으로 가져다준 음료와 기념품까지 얻을 수 있는 ‘일석이조’ 의 공간이기도 하다. 젊은 그들이 옹기종기 앉아 커피를 마실 때면 가급적 그 자리에 가지 않는다.후배들을 위한 나의 배려인 셈이다. 그저 “어서 오소”, “잘 가소”만 반복할 뿐이다. 선배 노릇으로 이보다 좋은 길은 없다. 때론 그들의 대화에 껴서 미주알고주알 직장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말하고 싶지만 애써 참는다. 산티아고도 이런 모습을 본다면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거대한 청새치와 상어 떼와 싸우며 삼일 낮, 밤을 보내야 했던 산티아고 노인은 물먹은 솜이 되어 집으로 향한다. 그것도 돛을 메고서 말이다. 그는 집에 도착하기까지 무려 다섯 번이나 주저앉는다. 누구한테 도와달라는 부탁도 없이 그저 그렇게 제 길을 갈 뿐이다. 이 장면을 가리켜 철학자 최진석은 십자가를 매고서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예수를 연상케한다고 했다. 그렇구나! 멋진 해석에 절로 무릎을 친다. 뭐든 꿈보다 해몽이 좋아야 한다. 해몽만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머잖아 내게도 짐을 들고서 교문을 나서는 날이 올 것이다. 차 트렁크에 몇 권의 책과 일상용품을 넣고서 집으로 돌아가는 그때를 그려본다. 예전 같지 않은 체력과 여의치 않은 연금, 전업주부인 늙은 아내가 남아 있을 것이다. 그것은 하늘로부터 호출을 받기까지의 밑천이니,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다. 버릴 수 없으니 애써 안고 가야만 한다. 일종의 삶의 무게이니. 걷다가 힘들면 산티아고 노인처럼 쉬면 될 터이다.


<노인과 바다>에서는 사자가 나타나는 꿈을 묘사하는 장면이 수차례 나온다. 삼일만에 귀가한 산티아고 노인이 깊은 잠에 들었던 때에도 꿈에 사자가 등장한다. 백수의 왕, 라이언 킹. 그것은 노인의 무의식에 있는 인간의 존엄함을 뜻한다. 그것은 젊은 어부들의 비웃음도, 청새치와의 투쟁도, 상어 떼의 공격 따위도 범할 수 없는 존재의 비범함이다. 먹구름 위에도 태양이 빛나고 있듯이 우리 본성에 있는 진리를 표상한 것이 사자이리라.


사자의 의미를 헤아려본다. 그것은 생로병사를 초월한 위대한 존재이니 내 안에 사자를 품고서 살아가기를 소망한다. 엽총을 입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던 헤밍웨이에게 사자는 무엇이었을까? 자살 직전 그가 내뺕었다는 “이젠, 써지지 않아! 써지지 않아!”라는 말이 떠오른다. 짐작컨대 헤밍웨이에게 '사자'란 문학이 아니였을까 싶다. 불현듯 “사람은 파괴될 수 있어도 패배하지 않는다”라는 그의 글이 의미심장하게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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