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겁한 이들을 위한 찬가

<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by 박신호

교회력으로 대림절이다. 아기 예수를 기다리는 시간이 되었다. 한해의 종착을 알리는 서곡이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조만간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라는 환호 소리가 울려 퍼질 것이다. 제대에 놓인 보랏빛 촛대에서 너울대는 빛을 바라본다. 올 한 해도 견디었구나. 내 삶의 자리가 무탈했음을 신께 감사드린다.


세상 곳곳이 화탕지옥이다. 가자지구를 향한 시온주의자들의 폭력과 우크라니아 전선에서의 참상은 여전하다. 포격에 무너진 담 아래 깔린 혈육의 시신을 부여잡고 통곡하는 팔레스타인 아빠와 드론에 쫓기는 병사에게 성탄절은 먼 나라 신화이다. 하지만 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인색하다. 대신 뚱보 산타가 던져주는 자본의 선물에 환호할 뿐. 로이 부케넌의 “주여 다시 오소서(The messiah will come again)”낮고 우울한 선율이 귓가에 아련하다.


아일랜드 작가 클레어 키건의 소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거짓에 감춰진 고통받는 이들에 대한 애정이 녹아 있다. 책 표지에 그려진 앙상한 나뭇가지와 을씨년스러운 까마귀 모습이 눈길을 끈다. ‘이처럼 사소한’과 ‘검은 까마귀’는 소외된 존재를 의미하는가 싶다.

무엇보다도 책은 호흡을 가다듬고 느리게 음미해야 한다. 도서관에서 책을 기웃거리다가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란 제목에 끌려 대출했다. 처음엔 설렁설렁 읽었는데 후반부로 갈수록 주제 의식이 만만치 않음을 눈치챘다. 자세를 곧추 잡고서 다시 읽어야 했다. 얇은 분량임에도 책의 명성이 높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첫 문단부터 범상치 않았다.

"10월에 나무가 누레졌다. 그때 한 시간 뒤로 11월의 바람이 불어와 굴뚝에서 흘러나온 연기는 가라앉은 북슬한 끈처럼 길게 흘러가다가 부도를 따라 흩어졌고 곧이어 흑맥주처럼 검은 배로 강이 빗물에 몸이 불었다."


수려한 문장이자 빼어난 번역이다. 옮긴이는 작품의 원전을 가리켜 ‘차라리 시였고 눈의 결정처럼 섬세하다’고 찬사를 보냈다. 더불어 작가가 던지는 문제의식은 묵직했다. 작가 클레어키건은 주인공 빌 펄롱의 궤적을 보여주면서 '당신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겠냐'라고 독자에게 묻고 있다.


양심을 생각해 본다. 양심은 작품을 관통하는 키워드이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는 '양심에 털이 났냐'는 식의 조롱은 난센스이다. 양심은 신이 준 기본 옵션이니 타락할 수 없다. 단지 본연의 빛을 잃을 뿐이다. 먹구름 위에서도 태양은 밝은 것처럼. 언제가 들었던 “죽어서 천국 가는 것은 민망하지만 지옥행 또한 억울하다란 말이 떠오른다. 소시민은 나약한 존재다.


김수영의 시 한 구절이 생각난다. 시인은 <어느 날 고궁을 나서면서>에서 자신의 소시민성을 이렇게 고백한다.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 위에는 서 있지 않고 /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소설의 주인공 빌 펄롱은 운 좋은 사내였다. 그는 태생은 불행했으나 널찍한 바람벽이 되어준 미시즈 윌슨과 일꾼 네드 덕분에 잘 성장했다. 어른이 된 후에는 착한 여인 아이린을 만나 결혼했고 타고난 성실함으로 단란한 가정을 이루었다. 그해 12월은 추웠으나 빌과 아내, 다섯 딸의 하루는 안온했다. 일상의 평화에 흐뭇한 빌은 "우린, 참 운이 좋지?"라고 속삭인다. 그는 성탄 선물을 떠올리면서 행복에 잠긴다. 수녀원 세탁소에서 학대받는 아동을 보기 전까지는.

생각을 포기한 순간, 소시민은 카르텔이란 괴물로 전락하기 쉽다. 주변의 이웃들로부터 선량하다고 인정받았던 아이히만의 정체는 아우슈비츠 수용소 유대인 학살자였다. 그는 전범 재판에서 상부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항명했다. 아이히만은 생각없는 평범한 괴물이었다.


평범한 수녀들이 운영하는 막달레나 세탁소는 아동 학대의 현장이었다. 빌은 수녀원에 갇혀 노동으로 지새우는 아이들을 목격한 후, 꿈틀대는 양심과 일상의 안온함 사이에 갈등한다. 그의 갈등은 영성체마저 받들지 못하게 한다. 성탄 분위기가 무르익을수록 그의 번민은 깊어져 갔다. 그것은 양심의 소리였다.

빌 펄롱의 고뇌는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나 역시나 살아오는 동안 숱하게 마주했던 것들이다. 젊을 때는 양심과 위선의 경계가 뚜렷했지만, 세월이 지날수록 이를 식별하는 것이 어려웠다. 아마도 모든 현상에 선악이 혼재되어 있음을 눈치챈 후부터였으리라. 한때 빛을 가리키며 소리치던 이들이 그럴듯한 명분으로 변절하는 모습을 보았다. 반면에 몹쓸 녀석이라 여겼던 이가 달리 보이는 경험도 하였다.


최소한 괴물은 되지 않기로 다짐해 본다. 양심대로 살아갈 용기는 부족하지만, 타인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삶은 결코 거부하련다. 목청 높은 이가 세상을 바꾼다지만, 정작 세상을 지키는 이들은 침묵하는 다수가 아니던가. 위선자라고 손가락질을 받을지라도 할 수 없다. 나의 논리를 타인에게 강요하지 않고 이념의 그물에 갇히고 싶지 않다. 그냥 인간이 되는 삶. 양심이 허락하는 마지막 경계에 머물 줄 아는 인생이고 싶다.

평온한 일상과 불의한 카르텔의 묵인에 갈등하던 빌은 마침내 선택한다. "다 한통속이야. 나랑 같이 집으로 가자. 세라. 아이를~빛을 내며 밖으로 나오고 있다. (120쪽)" 크리스마스 선물로 그가 하늘로부터 받은 것은 양심. 비록 사소하다지만 빌의 영혼은 빛으로 충만해졌다. 그것은 소시민 빌이 지켜낸 양심의 빛이었다.


"모래야. 나는 얼마만큼 적으냐 // 바람아 먼지야 풀아 /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시인은 자신의 비루함을 두고서 '얼마큼 적냐'고 탄식한다. 고뇌하는 시인에게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 지난 12.3 비상계엄 당시, 707부대 젊은 병사들의 흔들리던 동공과 그들의 순결한 양심을 보았노라고. 하여 세상은 아직 견딜만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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