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은 중원의 원류였다. 수천 년 역사의 희비가 소용돌이쳤던 대륙의 심장 장안. 지금은 시안이라 호명하고, 서안(西安)으로 적고 있지만 장안(長安)이란 옛 이름이 제격인 곳이다. 한때 로마와 더불어 오늘날의 뉴욕에 비견될 만한 국제도시였다. 세상에 회자(膾炙)되는 ‘장안의 화제’의 본향이 바로 이곳이니, 가히 장안은 낙양과 더불어 중국을 대표하는 고도(古都)라 하겠다.
실크로드를 향한 나의 환상은 장안에서 출발한다. 진작부터 유럽의 어느 도시보다 이곳을 그리워했다. 하지만 장안과의 인연은 쉽사리 닿지 않았다. 번번이 세상살이에 발목을 잡혀야 했다. 대신 아내와 아이들이 공항으로 떠날 때마다 터미널에서 손을 흔들어 주는 것으로 대리만족을 했다. 지난 을사년 환갑을 맞이했는데, 다시 한 살이 된 기념을 그냥 보낼 거냐는 주위의 권유가 있었다. 마침, 같은 처지의 친구와 의기투합해서 인천으로 달려갔다. 새벽녘에 도착한 인천 공항은 꿈속으로 들어가는 게이트였다.
삼국지는 황하에서 유비가 누런 하늘을 우러르며 탄식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서안 공항에서 마주한 허공은 유비가 보았던 그때처럼 누런 연무에 젖어있었다. '장안'이란 붉은 간체자만이 선명하게 보였다. 장안은 진시황의 통일제국, 항우의 패왕별희, 장건의 서역 개척, 현종과 양귀비. 삼장법사 현장의 서유기, 이태백과 두보의 한시. 천하무림 화산파, 현대 중국을 뒤흔든 서안사변의 무대가 아니던가. 쏼라~ 쏼라~ 요란한 성조음이 여행의 맛을 더해준다. 참으로 감개무량! 마침내 한족의 본향에 발을 디뎠구나.
현지에서 조우한 일행은 여덟 명이었다. 남양주에서 왔다는 양띠 여고 동창 여섯과 뱀띠 사내 둘. 조선족 출신 가이드는 나와 친구더러 ‘곗돈을 탔다’며 우스갯소리를 한다. 기분 좋은 출발이다. 주어진 3박 4일은 장안을 오롯하게 보기란 불가능한 시간이다. 그렇다고 객창감(客窓感)마저 없을 리 없겠지만. 장안의 거리를 거닐면서 백거이의 장한가(長恨歌)에 나오는 천장지구(天長地久)의 뜻을 음미한다. "끝없는 하늘과 영원한 대지여. 일장춘몽의 인생이여."
세상살이란 그림자처럼 허상에 불과한 것은 아닐련지? 숱한 중원의 영웅도 강호의 협객들도 시간이란 수레에 실려 먼지처럼 사라졌다. 밀려드는 인파에 놀랐던 병마용갱 관람 중에서도 줄곧 그런 상념이었다. 이천 오백 년의 세월을 견뎌낸 토우병들의 뒤로 진시황의 아우라가 느껴졌다. 전국시대를 통일하고 스스로 황제라 칭했던 진왕 정(政). 생부를 죽임으로써 출생의 비밀을 감췄던 냉혈한. 영생불멸을 꿈꿨던 황제는 영리하고 성실했지만 대규모 토목 공사와 분서갱유 등으로 제국의 몰락을 재촉하고 만다.
서불이 이끄는 불로초 탐험대를 동방에 파견한 황제는 신선이 되고자 했다. 단약(수은)을 삼키면서 우화등선을 바랬건만 끝내 부질없었다. 황제는 마흔 여덟의 나이에 전국을 순시하다가 사망했다. 그의 몸은 비린내 나는 생선 속에 파묻혀서 장안까지 이동했다. 생선은 시신의 냄새를 가리기 위한 방향제였다. 진시황 사후 도처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제국은 무너졌다. 호화로운 아방궁도 초패왕 항우의 손에 불탔노라고 사마천의 <사기>는 전하고 있다.
황제의 욕망은 이집트의 파라오보다 높아서 현대 기술로도 그의 능을 온전하게 발굴할 수 없다고 한다. 대신 그가 남긴 병마용갱은 천하제일 관광지가 되어 사계절 밀려드는 인파로 가득하다. 진시황은 1970년대 우연하게 이곳을 발견한 양 씨 집안에게는 장사 독점이라는 선물을, 중국 정부에게는 위대한 중화사상이란 국뽕을 하사했다.
장안에 오면 비련의 로맨스를 만나야 한다. 화려한 당 제국의 상징하는 화청지. 그곳의 주인공은 현종과 양 귀빈이다. 경국지색 양귀비는 춤솜씨가 뛰어났던 육감적인 사랑꾼이었다. 이들의 사랑이 무너진 것은 현종 탓이 크건만 세상은 그녀만을 탓한다. 둘째 날 오전 화청지를 둘러보았다. 눈을 끄는 것은 백옥으로 된 양귀비의 나신 조형물이었다. 시객 백거이는 <장한가>에서 화청지에 노니던 양귀비를 이렇게 노래한다.
‘눈동자 움직이며 한번 웃으니 온갖 교태 피어나고 / 어여쁘게 단장한 후궁들 광채를 잃었다오 / 봄 날씨에 화청지에서 목욕하니 / 온천물 매끄러워 백옥 기름 같은 살결을 씻어주네’
그녀의 본명은 양옥환. 미녀가 많다는 사천 지방 출신이다. 시절은 ‘개원치지’ 당제국의 태평성대였다. 궁이라 불렸던 화청지에서 달을 사랑한 이태백은 시를 읆었고, 예능의 달인 현종은 악기를 연주했으며, 귀빈 양옥환은 서역에서 들어온 현란한 춤사위를 선보였다고 한다. 극락 세상이 따로 있겠는가. 이들이 노닐던 화청궁이 그곳인 것을.
달도 차면 기우는 법. 현종과 양귀비의 지극한 사랑은 칼날 앞에 통곡하며 사라졌다. 안녹산의 반란군을 피해서 현종과 양귀비는 길을 나서야 했다. 하지만 모든 재앙이 양귀비 탓이라는 호위병들의 시위에 굴복한 현종은 그녀를 내주었다. 양귀비는 군졸에게 끌려가 목졸림을 당해 죽었다고 한다. 화청지 관람을 마치고 버스에 탑승한 나는 그녀의 사랑과 비극을 생각하면서 백거이의 장한가(長安歌)를 펼쳐보았다.
이번 장안 여행길에 가장 벼르던 곳은 서안 박물관이었다. 동서양 초원 지대를 연결한 실크로드의 주역 소그드인들의 흉상을 보고자 해서였다. 이때도 인파에 떠밀려 박물관 이곳저곳을 떠돌았다. 이 지긋지긋한 사람 구경이 대체 얼마 만이던가. 젊은 날 성탄 이브날이면 충장로 우체국 앞과 골목길을 가득 채웠던 청춘들이 그리워진다. 부디 잘 살아내기를. 파이팅입니다요!
박물관에서 만난 유물 가운데 가장 반가운 것은 한혈마였다. 이쯤 해서 서역을 중원에 알린 장건이란 사내를 떠올려야 한다. 그는 머나먼 월지국을 찾아 나섰다가 두 차례나 흉노의 포로가 되어 반강제로 그곳에서 처자식까지 얻어야 했다. 하지만 장건은 13년 만에 기어코 탈출하여 한무제에게 서역에 현황을 보고한다. 이때 달릴 때 피 같은 땀을 흘린다는 서역의 명마 한혈마의 존재가 알려지게 된다.
한무제는 한혈마가 절실하게 필요했다. 마침내 한나라의 원정군이 중원을 넘어 서역으로 향하게 된다. 장건의 보고를 기점으로 동서를 잇는 길이 생겼다. 이 길은 곤륜산 넘어 타클라마칸 사막을 두고서 북로와 남로로 나뉜다. 중국의 비단, 도자기, 서양의 유리, 향료, 말 등 물품들이 장안과 로마까지 오가게 되었다. 훗날 어느 독일 탐험가는 이 길을 가리켜 실크로드, 비단길이라 명명했다.
여러 유적지에서 인간의 생사를 생각하던 중 영화 <황산벌>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백제의 계백이 오천 결사대를 끌고 출전하기 전날 밤이다. 계백은 아내와 자녀 목에 칼을 겨누며 이렇게 말한다. “호랑이는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기는 법이여. 깨끗하게 죽어 불자."
자식을 감싸고 있던 그의 아내가 절규한다. “뭐라고? 입은 삐뚤어져도 말은 바르게 해야제. 호랑이는 가죽 때문에 뒤지고, 사람은 이름 때문에 디지는 것이여. 이 인간아.” 어쩌면 장안에서 마주했던 유적과 유물들이 바로 호랑이 가죽이요, 사람의 이름은 아니었을까.
여행의 말미가 다가오자 중국의 오늘이 보이기 시작했다. 장안 대로에 가득한 차량 물결. 거리와 관광지를 메우던 인파들. 한족의 강한 번식력은 두려울 지경이었다. 14억 중 화인들이 빨아들일 에너지와 AI 첨단국으로 변화가 분단의 반도인의 눈에는 근심 덩어리로 보였다.
19세기 중엽 황비홍 시절 중국은 서구의 먹거리였다. 세계대전과 국공내전이란 고난의 시간을 보낸 후 지금의 중국이 탄생했다. 마오쩌둥과 등소평의 말대로 모든 인민이 쌀밥과 고기를 먹게 된 것은 현대사의 기적이다. 하지만 21세기 중국의 고민은 깊어 보였다. 빈부의 격차. 심각한 취업난. 우리의 사교육 시장도 상상할 수 없는 교육 광풍. 서울의 16배라는 장안의 거리는 날씨만큼 어어두웠고 행인들의 표정은 무거워 보였다.
여행 중 카메라에 찍었던 수백 장의 사진을 정리하고 있다. 대부분이 사진이 장안의 거리와 유물, 유적을 담고 있다. 서안 공항에서 우리 일행을 배웅하는 가이드가 “사장님은 장안에 혼자 오세요. 그래야 될 것 같아요. 그때는 비림(碑林)과 낙양을 꼭 가보세요.”라며 말을 던진다. 더불어 여행 리뷰에 자신의 평을 꼭 써 달란다.
여행과 꿈은 현실을 떠난다는 점에서 닮아있다. 크게 편하다는 장(長) 안(安). 이곳에 얽힌 숱한 인간사는 애절하고도 아름다웠다. 끝없는 자연 앞에 잠시 머무는 것이 인생임을 깨닫는다. 어차피 세상은 천장지구(天長地久). 사람살이가 한바탕 꿈, 장안몽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