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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신호 Feb 08. 2022

차, 차, 차~ 행복의 일탈이여

<Shall you dance>, 영화 왕과나 ost 

#1

햇살이 흐려지는 늦은 오후. 갑자기 방 안에서 음악이 흘러나온다. 충전 중이던 손전화가 <shall we dance>를 노래하고 있다. ‘어서 전화 받으라’라는 독촉 음이건만 급하지 않다. 오히려 안개처럼 흐렸던 기분마저 산듯해진다. <shall we dance>의 멜로디에 맞춰 마음은 한 발 두 발 경쾌하게 스텝을 밟는다. 몇 해 전, 이 노래는 빌리조엘의 <My life>와 경합 끝에 내 손전화의 알림 노래로 낙점받았다.    

  

아내의 손전화에는 이선희의 <인연>이 저장되어 있다. 뭔가 한스럽고 슬픈 이 노래가 울릴 때마다 마치 ‘인연’임을 잊지 말라는 아내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내 손전화에 저장된 <shall we dance>를 듣던 아내는 자신의 저장 곡인 <인연>보다는 못하다고 평가절하한다. 분명 나와 아내는 화성과 금성 출신임이 분명하다. 어쩌다 출신 다른 종족이 이곳 푸른 지구별에서 만나서 아웅다웅하고 살게 되었는지 알 수 다. 아무래도 ‘인연’ 탓인가 보다.     


#2

<shall we dance>는 영화 <왕과 나>의 주제곡이다. 이 영화는 1956년에 개봉했는데, 당시 아카데미상을 여러 개 받았다. 나는  <왕과 나>를 대학생 시절에 비디오로 보았다. 시얌국(국) 국왕과 영국인 가정교사가 국적과 신분을 넘어서 요샛말로 썸(?)을 탄다는 대략 그런 내용이었다. 다만, 국왕과 영국 가정교사가 손잡고 춤추던 장면에서 흐르던 <shall we dance>의 경쾌한 선율은 오랫동안 기억되었다.

     

영화에서 국왕 역으로 연기한 ‘율부리너’의 존재는 강렬했다. 빛나던 민머리와 강한 눈빛은 그의 상징이었다. 훗날 폐암으로 사망한 율부리너는 ‘헤비스모커’였다고 한다. 담배도 강렬하게 피웠던 모양이다. 가정교사 안나 역의 ‘데보라 카’는 다정한 초등학교 선생님 같은 인상이다. ‘그레이스 케리’에게 느껴지는 여신급의 비현실감이 그녀에게는 느껴지지 않는다. 만약 누군가 내게 “shall we dance?”의 선택권을 준다면, ‘데보라 카’에게 할 것이다. 물론 그녀도 지구를 떠난 지 여러 해가 되었지만.     


#3

정작 <shall we dance>가 내 삶에 다가온 것은 헐리우드 영화 <왕과 나> 때문이 아니었다. 3 담임을 십여 년 넘게 했던 때가 있었다. 아침 650분 출근해서 저녁 10시 퇴근이 다반사였다. 토요일에도 오후 5시까지, 일요일도 순번제 근무였다.(사실은 거의 매번 출근했음). 남들이 부러워하는 방학이 있는 직업이건만, 내게는 일주일의 휴가가 고작이었다. 그렇게 부러워하는 그들을 부러워하면서 십여 년을 지냈다. (정확히 15. ~비명)

 

그 시간 동안에 쌓였던 스트레스는 영화감상을 하면서 녹였다. 늦은 저녁, 홀로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자정 넘은 시간에 귀가할 때면, 신기하게도 쌓였던 노곤함이 증발해버렸다. 일본 영화 <shall we dance> 그무렵에 보았다. 우선 <왕과 나> ost와 동일한 노래 제목이라서 반가웠다. 영화 <shall we dance>는 마지막 상연 시간에 졸고 있던 매표 직원을 깨워서 표를 끊었다. 아마도 자정이 가까운 저녁 11시 무렵이였나?

   

#4

 영화에서는 ‘스기야마 쇼헤이’라는 일상에 지친 성실한 중년의 사내가 등장한다. 상대역으로는 차도녀 이미지의 ‘기시가와 마이’라는 댄스학원장이다. 직장과 가정에서 성실했음에도 정체 모를 허무에 허덕이는 ‘쇼헤이’. 춤에 대한 회의감으  우울한 차도녀 ‘마이’.  춤 때문에 벌어진 러 에피소드 끝에 고인 물과 같았던  무료한 일상에서 벗어난다는 이야기이다.     

  나는 ‘쇼헤이’의 처지에 이심전심으로 공감했. 늦은 저녁, '쇼헤이'가 지친 얼굴로 지하철 의자에 멍하게 을 때면 그옆 내가 있었고, 그가 ‘마이’에게 반해서 댄스학원을 등록할 때면, 나도 따라 등록했다. 그리고 ‘쇼헤이’가 춤을 추면서 일상 답답함에서 벗어날 때는  함께 벗어난 기분이라고 해야하나? 아무튼 그와 나는 ‘물아일체’였다. 스크린 속의 ‘쇼헤이’는 영사기 빛에 불과하거늘, 그에게 강한 전우애를 느꼈다.     


<shall we dance>는 일탈의 아름다움이다. 그 감동은 이 영화를 비디오로 반복하여 시청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비록 댄스학원에 등록할 용기는 없지만, ‘룸바, 차차차, 탱고, 왈츠, 퀵스텝’ 등 다양한 춤의 향연 동경하게 되었다. 나이 지긋한 노신사가 세월이 품위있게 녹아있는 그녀와 손을 맞잡고 우아하게 춤을 추는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흐믓하다. 몸치인 내게 그럴 날이 올까 싶다. 혹시나 금성인 아내가 그 꼴을 보다못해 파트너로 자청한다면 곤란한 일이다.      


#5

일탈이 재앙인 경우도 있다. 일탈은 ‘중독’과 죽마고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심각한 것은 일상의 쓰나미에 빠져버린 경우이다. 번 아웃 상태로 일탈마저 꿈꾸지 못한다면 그야말로 심각한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용인된 범위에서 자신의 해방구를 찾아야 한다. 어쩌면 문화센터나 평생교육원은 허락된 일탈의 해방구일 것이다.

     

나는 아름다운 일탈을 찾고 다녔다. 그리고 작년에 글쓰기 교실의 문을 두드렸더니 활짝 열렸다. 글쓰기는 내게 몰입의 즐거움을 선물했다. 글은 나의 빈곤한 어휘와 가난한 문장도 받아주었다. 다행히도 누에가 고치에서 실을 뽑아내듯, 내 안에도 엉켜있는 실 뭉치가 제법 있었다. 퇴고의 아름다움도 배웠다. 딸이 그토록 화장을 열심히 하는 마음도 헤아려졌다


 글쓰기는 ‘스기야마 쇼헤이’의 춤만큼이나 행복한 일탈이었다. 가족과 친구들이 던지는 ‘그대에게 이런 재주가?’라는 의심의 눈치 있었지. 어느 동네 아주머니가 내 글을 읽고서 울었다는 아내의 말에 “왜?” 물었는데 감사한 일이었다. 글쓰기는 장년의 내리막에서 만난 행복한 일탈이었다. 다가올 노년이 그리 심심하지는 않으리라는 예감이 든다. “shall we write?”(맞는 문장인지?) 아무튼 고맙고, 감사한 일이다.      


Shall we dance, on a bright cloud of music Shall we fly

우리 춤춰요, 음악의 밝은 구름 위에서 우리 날아요    

 

Shall we dance, Shall we then say goodnight and mean goodbye

우리 춤춰요, 그러고 나서 “우리 잘 자요”하고 인사해요     


Shall we still be together, with our arms about each other, And shall you be my new romance

(우리 함께 있어요, 우리의 품을 서로 안으면, 당신은 나의 새로운 로맨스가 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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