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S는 익명의 세상이다. 투명해지는 자신이 부담스럽고 괜스레 불안해지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자가용의 농도 짙은 썬팅도 이런 심리일 것이다. 일탈의 세계에서 내 별칭은 ‘화개(花開)’이다. 삼십 대 중반쯤 어떤 모임에서 얼떨결에 셀프 작명을 했는데, 마침 떠오른 것이 그 무렵 출판되었던 김지하 시인의 <화개(花開)>란 시집이었다.
이후로 화개(花開)란 호명을 들을 때면, ‘음... 괜찮군. 작명을 잘한 것 같아’라며 흐믓했다. 더욱이 그 원류가 김지하 시인의 시집이라는 점에서 화개(花開)란 별칭에 만족했다. 간혹 누군가 그 뜻을 물으면, 김지하 시인 ‘어쩌구, 저쩌구’라며 으스대듯 말하곤 했다. 그럴 때면 그들은 ‘오..호, 아..하~’라며 추임새를 넣었다.
김지하 시인이 꽃피는 5월에 본향으로 떠났다. 한때 세상에 바람을 몰고 다녔던 시인이건만 세인들의 관심은 썰렁했다. 언론들은 0.7%로 힘겹게 신승한 새 대통령 취임 준비 보도에 바빴고, 시인의 죽음은 단신으로만 전했다. 대신 언론들은 어느 말 많은 논객의 독설은 부지런히 전파하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화개(花開)란 별칭을 김지하 시인에게서 떼어놓게 되었다. 아마도 시인이 박근혜 대선 후보를 지지할 무렵이었다. 그러한 시인을 향해서 세상은 ‘곱게 늙으라’며 한탄했고, ‘변절자’로 규정했다. 아무튼 화개(花開)라는 별칭의 뿌리도 ‘화개장터’와 불일암의 ‘수류화개’실로 옮겨갔다.
대학 입학 무렵, 시인은 청춘들의 거대한 바다였다. 한복을 입고서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던 시인은 한 마리의 사자였다. 대학 서점마다 <타는 목마름으로>, <오적>, <애린>, <남녘땅 뱃노래> 등 시인의 책들이 빛나고 있었다. 캠퍼스에서는 시집 <타는 목마름으로>를 들고 다니는 청춘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5월이었다. 그때 대학의 5월은 툭하면 휴강이었다. 강의실은 고요했고 거리는 뜨거웠다. 그 무렵 구경꾼도 아닌, 운동권은 더 아닌, 나 역시나 금남로에 갔다. 허망하게 시위가 끝나면, 학우들은 매캐한 최루 냄새를 지우려 주변 식당으로 몰려갔다. 나는 술 한 잔으로도 열 병 이상의 붉은 비주얼을 보여주는 터라, 그들에게 손만 흔들고 집으로 가는 정권 친화적 학생이었다.
그날도 계림동에서 친구들과 헤어졌고, 손수건으로 코를 움켜잡으면서 집으로 향했다. 해는 너울너울 넘어가고 있었다. 버스승강장으로 가던 중 헌책방이 눈에 들어왔다. 책방에 들어서니 주인은 안방 문을 쥐꼬리만큼 열고는 ‘책을 고르면 말해요’라며 다시 문을 닫았다. ‘빨리 사라’는 독촉의 눈이 없어서 편했다. 한참 동안 편하게 책의 미로에 빠졌는데, 미간에 주름이 잡힌 주인이 안방 문을 열고선 나를 쳐다보았다.
주름진 미간을 의식하면서 서둘러 책을 골랐다. 오래전 일이라 제목이 흐릿한데, <현대 동아시아의 생명사상가> 대략 이런 책이었다. 집필진 속에 있는 ‘김지하’란 이름 때문에 골랐던 것 같다. 계산하려고 호주머니를 뒤져보니 달랑 버스비만 있었다. 다행히 책값과 버스비는 비슷했다. 책을 사게 되면, 집까지 걸어야만 했다. 잠시 후, 계산하고 헌책방에서 나와서는 노을 빛이 번지는 거리를 하염없이 걸었다.
직장과 가정이 생겼을 무렵, 베토벤 음악감상실에서 차크라, 히말라야, 요기와 같은 이야기를 즐겨하는 이들과 만났다. 그렇다고 “도를 아십니까?”의 부류는 아니니 오해는 마시길. 어느 날 모임에서 단학선원 창시자와 시인의 결별이 화제였다. 시인은 그 선원에 가입했었고, 창시자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고 했다. 하지만 시인이 그곳의 문제점을 거론하자 심각한 불화를 겪었고 결국 탈퇴했다는 것이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는 소설의 제목처럼 시인은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 추락의 시작은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우라’는 시인이 쓴 조선일보의 칼럼부터가 아닌가 싶다. 시인은 투사에서 벗어나 생명운동으로 전환하는 여정을 시도했던 것 같다. 시인의 사상은 동학과 해월 최시형을 거쳐서 단군과 율려사상까지 이르렀다고 했다. 시인은 점점 추상화가 되어갔고 그의 사유는 수백 개의 퍼즐처럼 어려워졌다.
나는 시인을 향한 세상의 평가를 모두 동의하지 않는다. 시인은 ‘김영일’에서 ‘김지하’의 삶으로 살면서 정권으로부터 숱한 고초를 당했고, 그로부터의 영과 육의 마모는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의 일생에서 사용해야 할 에너지는 일정하다. 시인은 유신정권과 싸우면서 그 에너지를 한꺼번에 소모한 것 같다. 일종의 방전현상이다. 시인이 해남에 머물 당시 자주 나타났다는 환각 속의 검은 산과 하얀빛은 그 증거다.
시인의 난해한 사유는 생의 에너지를 찾으려던 몸부림은 아니었을까?. 생명과 평화, 기의 추구도 그 몸짓이었으리라. 시인의 모든 생애를 긍정하지는 않지만, 그의 고뇌와 애달픔에도 눈길을 주고 싶다. 어느 정도 민주화가 진전된 우리 사회는 시인에게 부채가 있다. 이제 긍정과 부정을 포함해서 마땅한 것은, 마땅하게 평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노년에 지쳐 보이던 시인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애송 시를 읊는다.
가랑잎 한 잎 / 마루 끝에 굴러들어도 / 님 오시다 하소서 // 개미 한 마리 / 마루 밑에 기어와도 / 님 오신다 하소서 // 넓은 세상 드넓은 우주 / 사람 짐승 풀벌레 / 흙 태양 공기 바람 태양과 달과 별이 / 다 함께 지어놓은 밥 // 아침저녁 / 밥그릇 앞에 / 모든 님 내게 오신다 하소서 // 손님 오시거든 / 마루 끝에서 문간까지 / 마음에 능라 비단도 널찍이 펼치소서 - <님> 시집 「화개(花開)」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