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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신호 Jun 09. 2022

 사자, 극장에 가다

#1

 주말이면 맹수가 되고 싶다. 섣부른 오해는 마시길. 짧은 크루 컷의 형님들처럼 거리를 활보하겠다는 뜻은 아니다. 이 맹수가 동물의 왕국에 등장할 때면 그 고독한 자태를 선망하듯 바라본다. 케냐 암보셀리 초원에 우뚝 서 있는 라이언 킹. 사자에게는 위엄이 넘친다. 세상 시름없는 표정으로, 푸른 초원을 느릿느릿 거니는 사자에게는 범할 수 없는 고독이 서려있다. 사자는 떼를 지어 다니는 하찮은 짓을 하지 않는다.      


 주말이면 한 마리 사자가 되어, 시공을 홀로 누빈다. 흐르는 강물을 따라서 운수납자처럼 종일 걸어도 보고, 박물관이나 미술관 주변을 어슬렁거리기도 한다.  콘서트 좌석도 일인석, 여행 티켓도 일인용. 심지어 식사도 혼밥이다. 이럴 때마다 초원을 홀로 다니는 사자를 떠올린다. 그 탓에 가끔 돌싱이냐는 은근한 오해를 사기도 한다. 아내는 동거인의 이러한 만행을 자치권 차원에서 인정해주니 다행이다.      

#2

 한 달에 한 번, 혼자된 사자의 기분을 만끽하는 공간이 있다. 바로 충장로 5가의 터줏대감 광주극장이다. 이곳은 계림극장도 무등극장도 날려버린 멀티플랙스의 바람을 버텨낸 빛고을 단관의 자존심이다. 박스오피스 따위에는 관심 없는 마이너들의 시네마 천국이기도 하다. 이곳 경이로움은 관객 좌석점유율이 평균 1%라는 사실이다. 1%의 관객들만이 사자처럼 찾아오는 초원이다. 그들을 볼 때면 반갑고 안심이 된다.  같은 종족이 세상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광주극장에 가는 날의 루틴은 정해져 있다.  물병과 책 한 권을 작은 가방에 넣는다. 되도록 자가용보다는 버스를 이용한다. 최소한 상영 30분 전에는 도착한다. 일 층 로비에서 천 오백 원짜리 커피를 주문한다. 2층 로비 의자에 앉아서 책을 보거나, 발코니에 서서 관음사와 영안반점 등이 있는 거리를 내려다본다. 극장 안에 들어가면 좌측 두 번째 고정석에 앉는다. 영화가 끝나면 광주천을 따라 걸어 귀가한다. 이미 오래된 메뉴얼이다.    


#3

 관객 좌석점유율 1%에 빛나는 이곳도 한때는 100%이던 시절이 있었다. 대학생 시절, 소개팅에서 만난 여학생과 광주극장을 찾았다. <황비홍>이란 홍콩 무협물을 보기 위해서였다. 극장 밖, 상영 입간판도 황비홍이었다. 늦게 도착한 탓에 급히 표를 받자마자 안으로 부리나케 들어갔는데 분위기가 요상했다. 어린 초딩들이 좌석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랬다. 우리는 그날 심형래 주연 <우뢰매>를 보았다. 황비홍은 다음날 개봉 예정이었다.     


 21세기가 막 시작할 무렵, 젊은 아내와 함께 광주극장에 당시 최고의 흥행물이던 <친구>를 보았다. 아내의 품에 잠든 아이가 깨지 않도록 숨을 죽이며 빈자리를 찾아 헤매었던 기억이 새롭다. 배우 장동건의 니가 가라. 하와이”, “내가 니, 시다바리 가~?”, “됐다! ~ 많이 묵었다.” 등 작열하던 영화 속 명대사를 이곳에서 들었다.     


 영화 <친구>의 시간은 훌쩍 지나갔고, 복합상영관 시대가 열렸다. 경영난에 허덕이던 광주극장도 독립, 예술영화 전용 극장으로 탈바꿈했다. 1935년 개관 이래 창극인, 국악인, 변사들 그리고 신성일, 안성기로 대표되는 스타들을 만날 수 있었던 곳. 90년 세월을 견뎌낸 시네마 천국은 퇴출이란 칼날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 다행이었다.     

 거듭난 광주극장은 이 지역의 개성 넘친 시네마 공간이 되었다. 이 무렵 평생 잊지 못할 에피소드가 생각난다. 어느 평일이었다. 김기덕 감독의 , 여름, 가을, 그리고 봄을 관람하고자 찾았다. 이날 따라 관객은 달랑 나 혼자뿐이었다. 불안해서 혼자인데 상영합니까?”라고 물었다. 직원은 아무렴요. 상영합니다.”라며 별 걸걱정한다는 표정이었다. 잠시 후, 오직 나만을 위하여 영사기 빛이 머리 위로 쏟아졌다.     


 스크린에 빛이 너울거리기를 30분쯤 되었나? 스크린 가득 베드신이 펼쳐졌다. 그 야릇한 장면 속의 여배우 얼굴이 어딘가 낯익었다. 순간, 눈동자가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바로 몇 해 전 졸업했던 우리 반 녀석이다. 제자의 베드신이라니 상상이나 했겠는가?

 

#4

 추운 겨울날, 이곳에서의 관람은 객석의 썰렁함에 혹한기 훈련이 가능하다. 천 이백석 넘는 큰 공간에서 1%만을 위한 난방이란 어림없다. 영화 관람전 따끈한 물과 장갑 준비는 필수 사항이다. 1층 로비에 있는 무릎 담요도 생존을 위해서 챙겨야 한다. 언젠가 아내도 이 혹한기 훈련을 참가했다. 영화 제목은 <위대한 침묵>이었다. 무려 세 시간을 상영 하는 동안 단 한 마디의 대사도 들을 수 없었던 침묵의 향연이었다.     


 얼마 전, 가객 정태춘과 박은옥의 다큐 영화를 보았다. 향수 어린 노래와 그들의 삶은 감동이었다. 내 비록 사자의 독존은 찬양하지만, 가끔은 공감을 나누고 싶을 때도 있다. 이 영화가 그랬다. 그렇게 위대한 침묵이후 광주극장이라면 침묵하던 아내와 재관람을 하게 되었다. 그녀는 오랜만에 찾은 나의 초원을 이렇게 혹평했다. 아휴. 묵은 냄새라고. 아내는 사자도 아니면서, 후각은 왜 이렇게 발달했는가?     


#5

 광주극장은 팝콘에는 1에도 관심 없는, 1%의 고독한 사자들을 위한 공간이다. 이곳은 건강한 일탈의 초원이며, 어떤 성전보다 은혜롭고 기품있는 장소다. 역사가 깊은 유럽 도시에는 수백 년 세월을 이겨낸 극장, 카페, 서점 등이 있다고 한다. 품격있는 사회는 과거 시간도 현재의 공간에 담아서 생존케 한다.    

  

 예전처럼 광주극장이 관객으로 가득 찰 것이라는 상상은 불허하겠다. 운영하는 분께는 미안하지만 말이다. 이제 이곳은 1%의 사자들을 위한 기름진 초원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다음 세기에도 스크린에 빛이 살아있는 공간이길 바란다면 욕심일까? 훗날, 허리가 구부정해져도 걸을 수만 있다면, 이곳을 들락거리는 행복한 사자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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