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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신호 Nov 04. 2021

어서 오세요. 푸르른 사원(寺院)으로

#1

푸른 산빛에 퐁당 빠졌다. 버겁게 여름을 보낸 가을 산은 정직했다. 산은 계절마다 치장을 달리한다. 봄이면 연두빛 사이로 비집고 들어온 꽃들로 울긋불긋하고, 여름에는 초록이 내뿜는 힘찬 무성함에 빛마저 무겁다. 감히 그 압도적인 기세에 눌려 다가서기조차 조심스럽다. 겨울의 산빛은 수묵화이다. 설원으로 덮인 산을 바라보고 있으면 몽유병 환자처럼 산에 부름을 받는다. 가을 산은 단풍에 물들기 전과 후로 나뉘는데, 아직 단풍을 영접하지 않은 가을 산의 푸른 빛은 순박하다.   

  

 설악산 대청봉에서부터 밀고 내려온다는 단풍이 아직은 범하지 않은 가을 산. 이 무렵 산빛은 화장기 없어도 고운 소녀처럼 맑다. 정직한 푸르름만 가득할 뿐이다. 앞으로 한 달쯤이면 산은 빨갛고 노랗게 단장을 할 것이다. 초가을, 산은 순한 가을 햇살에 안겨서 잠들고 있다. 하지만 단풍을 영접해야 하는 시간이 시나브로 다가오고 있다. 산은 붉은 절정을 감내하기 위하여 숨을 고르고 있다.    

 

#2

 홀로 산길을 걸어 다녔다. 생각해 보니 다른 이들과 함께 산을 걸었던 기억이 거의 없다. 배용균 감독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을 보고나서 산행을 시작했었다. 내 첫 산행은 청바지에 운동화를 신고, 폭설이 내라는 산을 걷지 못하고 기어 다니면서 시작했다.지나가던 산행객들의 아이고 ~ 어쩔라고..”라는 염려와 한탄만큼 호된 산행이었다.      


 직장에서 계룡산으로 산행을 갔었다. 애초부터 등산은 뒷전이고, 술부터 찾는 이들도 있었고, 정상에 먼저 서겠다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경쟁을 하는 직원들도 있었다. 이들은 오르막 산길, 바위와 돌부리가 매서운 산길을 잰걸음으로 달리는 듯했다. 그들 사이로 노익장을 과시한다며, 껴든 백발 성성한 어르신의 요란함은 측은했다. 정상에서 다시 만난 이들은 단축했던 시간을 놓고 또 우열을 가르고 있었다.   

   

 칠 부 능선쯤 걸쳐있는 산허리를 걷는 것을 좋아한다. 무엇보다도 산허리를 따라 돌면 외롭지 않았다. 지리산 심마니 길도 그랬고, 무등산 다님 길도 그랬다. 산허리를 거닐면 난만한 새소리에 집중할 수 있어서 좋다. 숲을 거닐 때 들려오는 새소리는 지쳐가던 산행객들에게 커다란 위로가 된다. 만약 새가 울지 않는 산이 있다면 얼마나 끔찍할까? 어디선가 나뭇가지가 흔들리면서 ‘푸드득’ 소리가 들리면, 몸은 꿈질하지만 비로소 가을 산의 너른 품에 들어왔음을 실감한다.     


산허리를 거닐다 내려다보면 마을이나 절이 보인다. 오전부터 천도재를 지내는지 산밑 절에서 독경 소리가 들려온다. 그 소리가 나무들 사이로 서서히 쌓이다가 바람 불면  흩어져 버린다. 산에서 만나는 절이나 암자는 산행의 화룡점정이다. 땀에 젖은 몸이 풍경소리에 이끌려 법당으로 들어가곤 했다‘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 마을에 내려온다'라고 노래한 시인의 말처럼 산에서 만나는 절은 외로운 영혼에게 벗이 된다.      


 산에서 풍기는 향기를 뭐라 표현할까? 어떤 이는 숲에서 ’비누냄새‘가 난다고 했다. 말장난인 듯싶지만, 분명 산이 내쉬는 호흡은 알싸하고 청량하다. 비가 멈추고 연무가 엷게 드리운 산길을 걷다 보면 비릿한 물내음이 나기도 한다. 흙과 바위 그리고 나무와 풀이 뒤엉킨 오묘한 향기가 후각으로 들어온다. ’피톤치트‘라 불리는 그 향기는 맑고 싸늘해서 몸 안을 뽀득뽀득 씻어내어 준다.    

  

#3

 오래 전, 백양사 뒤에 병풍처럼 서 있는 백학봉으로 들어갔다. 지금처럼 단풍이 미처 도착하지 않았던 10월이었다. 백학봉을 바라볼 때마다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꿈일거라 여겼다. 어느 날, 백학봉 입산을 작정했는데, 초입부터 급한 경사길에 숨이 막혔다. 낯선 산을 만날때면 느린 호흡이 더욱 필요하다. 정상을 자주 바라보는 조급함도 내려 놓아야한다. 조고각하(照顧脚下)야말로 숨가쁜 경사길을 오르는 산행의 비결이다. 그저 눈을 아래로 깔고 걸어야 한다. 그렇게 겸손한 자세로 산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백학봉 입산은 안전줄을 꽉 잡고, 몸의 중심을 뒤로하면서 시작된다. 그 뒤로는 무념무상 들숨, 날숨만을 의식하면서 걸닐 뿐이다. 그렇게 한동안 오르다 보면 백양사가 발밑으로 멀어져간다. 급경사 끝자락에 도달하면 바람, 은빛 억새, 낮은 조리대 군락지를 만날 수 있었다. 산행은 호흡과 의식의 상관성을 몸으로 터득하게 해준다. 그래서 산행은 명상이요, 기도이며, 깨어있음이다.     


#4

 언젠가 봄날의 무등산을 걷다가 바람에 흔들리던 커다란 나무를 보았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서있던 나무에 매달린 무성한 잎사귀들이 빛을 하얗게 튕기고 있었다. 물비늘만 반짝인 줄 알았는데, 나뭇잎의 찬란함도 못지않았다. 흐르는 땀을 닦으며 그 나무를 바라보고 있던 순간이었다. 오~놀라워라. 마치 ‘탈혼’이 된 듯, 깊은 고요함으로 들어갔다. ’나‘라는 주체는 흐릿해지고 무아의 정적과 에고의 소멸이 찰라에 벌어진 것이었다. 지금도 그 나무를 떠올리면 파란 허공과 물결치듯 투명하게 빛나던 나뭇잎과 물아일체의 황홀경이 생생하다.     


 산을 오른다는 등산(登山)은 교만한 말이다. 산은 우리를 안아주고 품어주는 어머니이다. 그 품으로 들어감을 뜻하는 입산(入山)이란 말이 지당하다. 나는 앞으로도 혼자서 입산을 할 것이다. 숲은 신성한 사원(寺院)이며, 내딛는 걸음은 생명을 향한 경배이기 때문이다. 예수님도 외로울 때면 홀로 산에 가셨다고 한다. 그 마음을 조금은 알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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