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좀 재미있는 문자 사연이 왔다. 지금 맡은 라디오 프로그램에는 청취자와 소소한 주제로 통화를 하는 '소통'이라는 코너가 있다. 매일 대화 주제를 청취자에게 들려주고, 재미있는 사연을 보낸 분과 통화를 하는 건데 오늘 주제는 “허리케인 고민 상담소 개장, 여러분의 나쁜 기억을 다 지워드립니다!”였다. 그러자 청취자들의 나쁜 기억, 고민 사연이 폭주했다.
주제가 주제이니만큼 오늘은 청취자의 이름과 핸드폰 번호를 밝히지 않고, 사연만 소개했다. 그중에 어떤 분이
‘저는 우리 집주인 때문에 미치겠어요. 집 계약 기간은 이미 끝났는데 아직 보증금을 못 받아서 못 나가고 있어요. 주인분들은 새벽마다 기도하러 가면서 온갖 거룩한 척은 다 합니다’라는 문자를 보냈다. 그 문자를 보는 순간 나도 그렇고, 같이 계신 부장님, 작가님들까지 빵 터졌다. 온갖 거룩한 척은 다 한다니. 세입자의 딥한 빡침(?)이 담긴 대목이었다.
그리고 결국 그분과 전화통화를 하게 됐다. ‘안녕하세요~’진행자분이 말을 걸자 예상외로 밝은 목소리의 아주머니께서 전화를 받으셨다. ‘예, 안녕하세요. 저 이 프로 많이 듣고 있어요.’ 뭔가 말씀도 잘 하실 것 같은 촉이 왔다. ‘오늘 사연을 익명으로 하기로 해서 제가 뭐라고 불러 드리면 될까요?’ ‘네? 갑자기 여쭤보시니까 잘 모르겠는데요’ 그러자 진행자가 ‘그럼 ’갑자기‘님으로 하죠.’라고 했다. ‘네네, 갑자기. 좋네요. 호호호’ 유쾌한 분이셨다.
인사를 마치고 본격적인 질문에 들어갔다. “아니 문자 주시면서 사진도 보내셨는데, 벽에 저게 뭐예요? 물이 새는 거예요?” 사연과 함께 보낸 사진 속에는 한쪽 벽면에 넓게 벽지가 젖어 있었다. ‘네, 그것도 정말 오래됐는데 처음에는 물 새는 거 전혀 없는 좋은 집인 척하시더니,’‘아니, 저 지경이 되도록 안 고쳐줬어요. 그래?’ 진행자가 공감하자 갑자기 씨는 애써 체념한 듯 말했다. ‘이제는 익숙해졌고, 얼마 전에 고치긴 했어요. 그것도 그거지만 저희는 어떻게든 나가고 싶으신데 보증금 돌려줄 돈은 없다고 하고, 정말’
‘아니, 근데 정말 돈이 없는 것 같아요? 어떤 것 같으세요?’ 갑자기 씨의 한숨. ‘그렇게 믿어야죠. 안 그러면 제 마음만 안 좋아지고. 그래서 그렇게까지는 생각을 안 하려고 하고 있어요’ ‘그런데 아까 새벽기도 나가시면서 온갖 거룩한 척은 다 한다고 그러셨는데 주인분이 교회 다녀요?’ ‘네, 매일 새벽마다 예배드리러 가시더라고요. 노부부가 그렇게 보기 좋게 다니고 그러세요. 그런 거 보면 나쁜 사람들은 아닌 것 같은데, 교회도 다니시면서 저희 사정을 너무 몰라주는 것 같아 답답해요.’ 전화기 너머 갑자기 씨의 답답함이 스튜디오에서도 느껴졌다.
진행자도 예전에 그런 집주인을 만났다며 후일담까지 나누며 속사포처럼 이어진 대화. 어느새 전화를 끊어야 할 시간이 됐다. 마지막으로 주인에게 시원하게 하고 싶었던 말을 하시라고 했다. 그러자 유쾌한 갑자기 씨.
"할아버지, 할머니. 교회 가시면 다른 거 기도하지 마시고, 집부터 빼 줄 수 있게 그거를 1순위로 기도하세요~~~"
라디오 부스 바깥 작가와 부장님은 또 빵 터지고 난리였다. 진행자도 웃음기 띤 목소리로 신청곡이 뭐냐고 물었다. 그러자
"이선희의 '그중에 그대를 만나'요"
진행자가 ‘하필이면 그 집주인을 만나’라는 의미인가요? 라고 묻자, ‘그런 것도 있어요’라고 하신다. 또 빵 터짐.
분명히 사연만 들으면 답답한데 묘하게 유쾌한 갑자기 씨의 한마디 한마디가 해학이 담겨 있었다. 나 역시 교회 다니는 사람으로서 부디 주인분이 정말 사정이 안 되는 것이기를. 그리고 상황이 빨리 나아져서 유쾌한 갑자기 씨는 원하는 곳으로 이사를 하실 수 있기를 나야말로 마음으로나마 기도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