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Z피디의 이븐한 음악일기 #1 -김추자 '커피 한 잔'
10분이 10시간 같던 기다림의 미학 - 김추자 '커피 한 잔'
MZ피디의 이븐한 음악일기 #1 - 50년 넘게 익어온 명곡, 김추자 '커피 한 잔'
요리 경연 프로그램 '흑과 백'에서 안성재 셰프가 깐깐하면서 절도 있는 표정으로 "저는 음식의 익힘을 중요하게 생각하거든요. 이븐하게 익었는지"라고 하며 크게 유행시킨 그 표현처럼, 음악도 시간이 지나면서 골고루 익어가는 것들이 있다. 처음 나왔을 때는 파격적이고 충격적이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그 진가가 더욱 선명해지는 그런 곡들. 이 일기는 그렇게 이븐하게 익어온 음악들에 대한 이야기다.
10분이 영원처럼 느껴지는 순간
만약 내 연인이 시켜놓은 커피가 다 식을 때까지 만나기로 한 곳에 나타나지 않는다면 더 기다려야 할까, 아니면 자리를 일어나야 할까.
일반적으로 커피 한 잔이 식는 데 걸리는 시간은 10분 내외라고 한다. 인스타 스토리 5-6개 볼 시간, 유튜브 숏츠 20개 정도 볼 시간이다. 목을 타고 내려가던 적절한 커피의 뜨거움이 먹기 애매한 온도가 되어가고, 연인은 연락마저 안 된다면 처음엔 화부터 날 것이다. 그러나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가? 연락을 해보지만 연락마저 되지 않는다면 혹시 오다가 차 사고라도? 몸을 다쳤나? 연락도 할 수 없는 정도인가?...라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나중에는 부디 무사하기만 했으면 하는 바람이 들지도 모른다.
요즘은 옛날보다 더 빨리 소식을 받을 수 있다. 우리 회사 부장님이 연애를 하던 때는 만나기로 한 시간에 상대방이 나타나지 않으면 한두 시간 동안 더 기다리다가 집에 가서 전화를 해봐야 마침내 소식을 알 수 있었다고 하니 말이다.
그런데 1970년, 전화기 한 대 설치하는 데 지금 돈으로 몇백만 원이 들던 시절에 만나기로 한 시간에 나타나지 않는다면? 더 애가 탈 것이다. 그리고 그 애 타는 9분과 10분 사이의 초조함과 배신감을 이렇게 섬세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바로 그 마음을 김추자는 이렇게 불렀다.
[김추자 - 커피 한 잔]
https://www.youtube.com/watch?v=iCsC2PJ7KhU
전화기도 없던 시절, 약속 장소에서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그 애타는 마음을. 커피가 식어가는 10분이 마치 10시간처럼 느껴지는 그 간절함을.
만약 김추자가 지금 '슈퍼스타K'에 나왔다면?
만약 이분이 지금 시대의 오디션프로그램에 나왔더라면 어땠을까? 단연 1등이 아니었을까. 1등을 넘어서 그 오디션프로그램의 의미는 이 사람을 발굴해낸 것이라는 평론까지 나올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이분의 노래를 들을 때마다 그런 상상을 한다. 진흙 속에 묻혀있던 소울 충만 소녀가 오디션프로그램에 나와서 노래 하나로 대한민국 대중매체를 떠들썩하게 하는 장면을. 얼마 전 이분의 '커피 한잔'과 '거짓말이야'를 선곡해 스튜디오에서 듣는데, 진짜 약을 하고 노래를 부르나 오해를 살 수 있었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너무나 파격적인 창법과 표현력. 그 시대에 이런 창법과 노래를 하다니. 지금 들어도 어떻게 이렇게 노래를 부르나 싶은데 그때는 오죽했을까?
70년대 음악계의 혁명가, 그리고 그 뒤의 험난한 길
김추자는 70년대를 대표하는 가수 중 한 명으로, 그 시절 그녀의 강렬한 보컬과 독특한 음악 스타일은 한국 대중음악계에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담배는 청자, 노래는 추자"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그녀의 존재감은 독보적이었다. 특히 한국 록 음악의 아버지라 불리는 신중현의 눈에 띄어 그의 곡들을 소화해낸 몇 안 되는 가수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화려한 무대 뒤에는 믿기 어려운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1971년 '거짓말이야'를 부르면서 무대에서 손짓을 했는데, 누군가가 "혹시 북한과 교신하는 게 아니냐"는 황당무계한 소문을 퍼트려 중앙정보부 조사까지 받는 일이 벌어졌다. 김추자는 후에 이 모든 게 박정희 대통령의 초청 공연을 거절한 것에 대한 보복성 소문이었다고 털어놓았다.
그해 여름 김추자는 갑작스럽게 은퇴를 선언했다. 방송계의 구태의연함과 각종 비리가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며 무대를 떠난 것이다. 그러자 가수협회에서는 1년간 방송활동 금지라는 강력한 징계를 내렸다. 하지만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따로 있었다.
1971년 12월 5일, 매니저였던 소윤석이 자신의 고백을 거절당하자 홧김에 소주병으로 김추자의 얼굴을 가격한 것이다. 김추자는 즉시 병원으로 실려가 응급수술을 받았고, 그 후에도 무려 여섯 차례나 성형수술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여기서 김추자의 프로 정신이 빛났다. 사고가 난 지 겨우 나흘 후, 얼굴에 붕대를 감은 채로 서울시민회관 무대에 올라 예정되어 있던 컴백 공연을 끝까지 해낸 것이다.
1975년 대마초 파동이 터지면서 김추자의 연예계 생활도 막을 내리게 됐다. 신중현의 작업실에서 몇 번 대마초를 피운 것이 문제가 되어 무대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1981년, 동아대학교 정치학과 교수인 박경수와 결혼하면서 연예계와 완전히 작별했다.
신중현의 마법, 김추자의 소울이 만나 탄생한 걸작
'커피 한 잔'은 신중현이 작곡한 곡이다. 신중현은 그 시절 우리나라 음악계에 사이키델릭 록과 소울 같은 서구 음악의 새로운 장르들을 들여와 엄청난 변화를 일으킨 인물이다. 이 곡 역시 단순한 이별 노래의 틀을 넘어서서 그 시대 사람들의 감정을 깊숙이 건드리는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김추자의 목소리는 이 곡에서 절정을 이룬다. 기다림의 조급함, 실망감,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할 수 없는 간절함까지. 모든 감정이 그녀의 목소리를 통해 생생하게 전달된다. 50년이 지난 지금 들어도 그 감정의 농도는 전혀 옅어지지 않았다.
여전히 남은 질문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궁금해진다. 노래 속 그는 얼마나 더 기다렸을까? '그대'는 결국 왔을까, 아니면 영영 나타나지 않았을까? 그리고 만약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얼마나 더 기다릴 수 있었을까? 어쩌면 그 답은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그 10분간의 기다림이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공명하고 있다는 사실이니까. 시대가 바뀌고 기술이 발달해도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마음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곡은 5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이븐하게 익어가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