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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꼬르륵 Aug 05. 2021

며느리의 빈자리

경상도 시어머니와 서울 며느리의 공동육아기록

첫째를 낳은 지 100일 지난 어느 날 새벽. 넓고 푸른 들판을 나 혼자 걷고 있었다. 저벅저벅. 그런데 조용한 발걸음 뒤로

뭔가 싸한 느낌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뒤를 돌아봤는데 엄청나게 큰 나무 한 그루가 정면에 떡 하니 서 있었다. 굵직한 나무 위로 푸른 나뭇잎들이 무성하게 반짝이는 광경을 본 나는 '이야, 장관이네'라며 감탄했다. 그렇게 반짝 눈을 떴는데 꿈이었다.


아침에 남편에게 지난 새벽 꾼 꿈 이야기를 하니 남편은 웃으며 "말만 들으면 완전 태몽인데?"라 했다. 그러고

유쾌하게 현관문을 열고 출근했다. 그런데 그건 정말 태몽이었다, 나는 첫째를 낳은 지 100일이 지났을 즈음 둘째를 임신했다.


그리고 둘째는 예정일을 훨씬 앞두고 태어났다. 한주 정도는 일찍 태어날 수도 있겠지 하며 느긋하게 출산 가방과 일정을 정리하고 있었는데 보름이나 앞두고 갑자기 새벽 내내 허리가 계속 아팠다. 다음날 통증이 찜찜해 막달 검사도 할 겸 산부인과를 갔는데 몇 시간 후 둘째를 낳았다. 연이은 산부인과 입원. 산후조리원 입실. 지난 13개월간 한 번도 떨어져 본 적 없는 첫째와 별안간 16일간의 이별이 시작됐다.   


몸이 힘들었지만 병원에 누워서도, 조리원에 있으면서도 첫째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밥은 제대로 먹고 있을까? 콧물감기는 괜찮아졌나...'


말만 못 할 뿐이지 갑자기 엄마가 어디 갔나 싶을 텐데 내가 없는 방을 기어 다닐 첫째를 생각하니 마음이 짠했다. 다행히 영상통화를 할 때 본 첫째는 할머니와 잘 지내는 듯싶었다.


어머니는 첫째가 찌부대지도 않고, 보채지도 않고 잘 논다며 아주 기특하다고 예뻐 죽겠다고 하셨다.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도 늘 밝고, 한결같은 어머니의 말씀에 나도 서서히 안심이 됐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을 무렵, 그날도 여전히 퇴근한 남편과 영상통화를 하며 첫째의 얼굴을 보고, 하루 안부를 주고받는 중이었는데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며늘아, 참 신기해요. 온유가 자꾸 며늘이 방으로 가요. 가서 멍하니 앉아있어요. 그러면 내가 가서 온유야, 엄마가 동생을 낳아서 지금은 병원에 있어요. 몇 밤 자면 엄마가 집으로 와요. 그렇게 설명을 하면 그걸 알아들었는지 다시 나와서 잘 놀아요. 그걸 보는데 내가 다 짠하더라...

(조리원에서 첫째와 영상통화)

순간 나는 왈칵했지만 그저 웃었다. 그런데 갑자기 화면 밖 남편의 목소리

"와, 엄마가 우노"

그 소리와 함께 어머니가 자리를 피하는 모습이 지나갔다.


'.......'


신기하게 어머니의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알 것 같았다. 첫째를 보며 짠한 마음 반. 당신이 그 빈자리를 다 채워주지 못하는 것 같은 미안함 반. 그런 것이었으리라.


나도 남편이 출근한 후 하루 종일 아이와 함께 집에 있으면서 아이가 칭얼거리거나 거실 창에 매달려 바깥을 볼 때 참 힘들었다. 최선을 다해 놀아주지만 나 말고 새로운 재미를 원하는 것 같았고, 만삭인 내가 데려가지 못하는 바깥을 나가고 싶어 하는 것 같아 참 미안했다.


그렇게 먹먹한 마음을 갖고 전화를 끊었는데 다음날 산후조리원 동기가 아주 단순하고도 명쾌한 이야기를 했다.


그냥 어머님께서 이제 힘이 드신 거라고.


'................, 허허허'


그런 거구나. 웃음이 나왔다. 참 쉽지 않구나 싶으면서도

이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짠한 존재가 되는 게 가족이 되는 거구나 싶다. 집으로 외출을 한번 다녀와야겠다. 오늘도 그렇게 가족이 됐다.

(조리원에서 둘째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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