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돼 - 조용필
지금이야 그때
지치고 힘이 들 때면
이쯤에서 쉬어가도 되잖아
그래도 돼, 늦어도 돼
(그래도 돼, 조용필)
2024년 가을, 73세의 가왕 조용필이 들려준 위로의 메시지 '그래도 돼'. 시대를 초월한 통찰과 따스한 멜로디로 수많은 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진 이 노래는, 어느 휴직 중인 라디오 PD의 마음속에도 깊은 울림을 남긴다.
1, 2, 3...
적막이 흐른다.
무슨 소리가 나겠지, 누군가 말을 하겠지.
하지만 다시 또 적막이 흐른다.
4, 5, 6, 7, 8, 9...
삐-
결국 경보음이 울리고, 스튜디오 밖 엔지니어가 긴급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스튜디오 기계에서 서둘러 찾은 비상음악파일을 재생시킨다. '뭐야 뭐야.' 같은 층 복도 끝 주조정실에서 생방송을 모니터하며 작업하던 엔지니어가 생방스튜디오로 뛰어들어온다.
1, 2, 3...
스태프가 한순간에 정신없이 움직인다. 사과멘트를 할 아나운서를 찾고, 파일 담당자를 확인하고, 대체 음원을 준비한다. 긴박하게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온 아나운서가 스튜디오로 돌진하고, PD는 숨 가쁘게 안내문을 써내려간다.
4, 5, 6...
"음악 소리 잠깐 낮춰주세요."
PD의 요청에 따라 엔지니어가 비상 음악 소리 볼륨을 낮추고, 마이크의 ON 버튼이 켜진다.
7, 8, 9...
"방송파일의 문제로 방송이 원활하지 않은 점 청취자 여러분께 사과드립니다."
라디오에서 9초의 정적은 '사고'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9초가 생방송 스튜디오에서는 영원과도 같다. 마치 우리가 삶에서 맞닥뜨리는 '멈춤'의 순간처럼.
한번은 이런 적이 있었다. 3분 50초 후 정시를 알리는 시보가 울릴 거라 생각하고 파일길이가 3분 48초로 저장된 엔딩곡을 틀었는데, 노래가 3분 41초에 끝나버린 것이다. (‘볼빨간 사춘기-우주를 줄게’였던가)그때의 7초는 내 인생에서 가장 길었던 시간으로 기억된다. 경위서를 쓰느냐 마느냐가 걸린 시간이었으까.
1, 2, 3...
그렇게 분초에 예민한 라디오 PD 생활 십여 년. 어느 날 갑자기 회사가 존폐 위기에 빠지고, 월급이 끊기고, 자의반 타의반 휴직을 하게 됐다.
4, 5, 6...
매일 아침, 남편은 직장으로, 아이들은 어린이집으로 떠나고 난 후 집안에 정적이 흐른다. 9초가 지나도, 90초가 지나도, 900초가 지나도 아무도 경보음을 울리지 않는다. 그저 시계만이 덤덤히 초침을 돌린다.
7, 8, 9...
아이들 장난감을 정리하고, 냉장고를 치우고, 옷을 개다가 문득 구직사이트를 들여다본다. 마땅찮은 조건들과 육아 병행의 어려움을 마주하며, 더 본질적인 질문들이 마음을 두드린다.
"나는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내가 진정 원하는 삶은 무엇일까?"
그러던 어느 날, 조용필의 '그래도 돼'를 듣게 됐다. 50년이 넘는 음악 인생 동안 수없이 많은 '멈춤'의 순간을 겪었을 그가, 이제는 후배들에게 건네는 위로 같았다. 어쩌면 우리는 살면서 마주치는 멈춤의 순간들을 9초의 정적처럼 두려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잠깐의 틈이 생기면 영원한 실패자가 될 것만 같은 강박에 시달리면서.
요즘 나는 ‘매몰비용의 오류’라는 개념이 종종 떠올린다. "이미 지출되어 회수할 수 없는 비용을 의미하는 이 경제 용어는, 어쩐지 내 삶의 어떤 부분과 닮아있었다. 특히 '매몰비용의 오류'라는 개념은 더욱 그랬다. 이미 투자한 것이 아까워서 성공가능성이 희박한 일에 계속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것, 돌이킬 수 없는 과거에 매달려 현재의 판단을 흐리게 만드는 이 오류는, 우리 삶 곳곳에 스며있다. 십 년을 해왔으니까, 이미 많은 걸 포기했으니까, 여기까지 왔으니까... 하는 생각들로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어쩌면 우리는 우리 인생의 너무 많은 시간을 확신할 수 없는, 또는 방향이 서지 않은 일에 끌려다니며 이런 오류를 범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멈춤'이라는 순간을 마주하면, 마치 라디오의 9초 정적처럼 견딜 수 없는 것으로 여기게 되는 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 나는 안다. 매몰비용의 오류를 범하지 않으려면, 때로는 과감히 멈추어 설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방향이 서지 않는다면 잠시 움직이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9초의 정적이 흘러도 괜찮다는 것을. 어쩌면 그 정적 속에서 우리는 더 선명한 인생의 멜로디를 듣게 될지도 모른다.
불안에 쫓기지 말자. 그래도 된단다. 늦어도 된단다. 어차피 늦는 것도 아니란다. 인생은 스피드게임이 아니니까. 혹시 같은 자리로 돌아오더라도 ‘본질’에 대한 고민을 한 ‘나’와 하지 않은 ‘나’는 다르지 않을까.
지금 이 순간, 조용필의 노래가 다시 한번 마음을 적신다.
"지금이야 그때, 지치고 힘이 들 때면
이쯤에서 쉬어가도 되잖아
그래도 돼, 늦어도 돼"
(글에 등장한 노래)
-그래도 돼(조용필)
https://www.youtube.com/watch?v=bo_dfa1p950
-우주를 줄게(볼빨간 사춘기)
https://www.youtube.com/watch?v=9U8uA702x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