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 가호
내가 지쳐 쓰러질 때까진
어떤 이유도
어떤 변명도
지금 내겐 용기가 필요해
빛나지 않아도 내 꿈을 응원해
(시작-가호)
라디오스튜디오에서 청취자들에게 신청곡을 받을 때 새로운 일을 시작했거나, 직장을 그만 둔 분들이 자주 신청하는 노래가 있다. 가호의 ‘시작’. 드라마 이태원클라쓰의 주제곡이기도 했던 이곡은 이제는 2030 젊은 사람들뿐 아니라 4050 어른들에게도 인지도가 높다. 드라마 속 주인공 ‘박새로이”가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마침내 성공하는 스토리는 어쩐지 매일 타협하며 살아가야만 하는 우리들에게 대리만족마저 느끼게 했다. 그런 주인공의 여정과 노래가 너무도 잘 맞아떨어졌기에 많은 청취자들이 이 노래가 나갈 때 마다 강직한 청년, 박새로이를 언급하시곤 했다.
하루는 50대 후반의 한 남성분이
"오늘 새 직장으로 첫출근하는데 옆좌석에 앉아있던 딸이 ’아빠 요즘은 첫출근 할 때 이 노래 들어야 돼‘ 하면서 ’가호-시작‘을 틀어줬습니다. 늦은 나이에 자격증 공부하는 저를 항상 응원해준 딸에게 정말 고맙습니다. 다시 듣고 싶네요."
라며 신청곡을 보낸 적이 있다.
어쩐지 뜨끈해지는 일상의 사랑 고백들. 그런 문자창을 보고 있으면 나도 덩달아 행복해지곤 했다. 그리고 늦은 나이에 자격증 공부를 하신 그 분의 심경, 그 분의 노력, 그리고 마침내 원하는 결과를 얻었을 때 그 분이 느꼈을 성취감이 어땠을까. 그런 사연에는 존경의 박수가 마음에서 절로 쳐지곤 했다. 인생 2막을 최선을 다해 준비해 또 다른 뿌리를 내린 청취자들. 나는 요즘 그때의 청취자들이 참 존경스럽다.
어느 날인가. 나는 식물의 뿌리를 보면서도 비슷한 존경심을 느낀 적이 있다. 어느 주말 역시나 눈을 뜨자마자 놀러 가자는 아이들을 데리고 식물원에 갔다. 밖에는 진눈깨비가 날리는데 푸르른 나무들과 후텁진 바람이 부는 식물원 안의 풍경이 이색적이었다. 거기다 화려하게 피어있는 꽃들. 등산복을 입은 아주머니들, 부부들이 화려한 꽃나무 앞에서 너나 할 것 없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런데 꽃보다 더 내 이목을 끈 나무가 있었다. 바로 ‘소크라테아 엑소리자’ 일명, ‘걸어다니는 야자나무“였다. 이름 아래 이런 설명이 있었다.
"소크테리아 엑소리자는 외부환경에 의해서 식물체가 쓰러지거나 다쳤을 때, 다친 부위가 사라지고 살아남은 줄기에 공기뿌리가 새로 생긴다. 이 모습으로 인해 걸어다니는 야자나무라는 별명이 생겼다"
그러고보니 땅 밖으로 붕 뜬 듯이 나와있는 나무 뿌리 줄기들이 마치 갈 곳에 있는 듯, 한 방향으로 걷는 것처럼 보였다. 신기함도 잠시 어느 지점에서 그랬는지 알 수 없는 뭉클함이 올라왔다. ‘쓰러진 채로 누워있는 게 아니라 다른 줄기를 뿌리 삼아 산다니’. 그 생명력은 어쩐지 보는 나마저 겸허하게 만들었다.
‘나는 쓰러져만 있으려는 나태함에 빠진 적은 없나. 지금 저 나무처럼 필사적일까?’
회사의 재정 위기로 휴직을 한 지 4개월 차가 되어가고 있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과 카페를 살피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들을 보살피는 것은 여전했다. 그런데 달라진 한 가지. 나는 서서히 이 막연한 불안에 안주해가고 있는 것 같았다. ‘지금은 이 정도로 사는 게 최선이야’라고 스스로 한계를 만들며.
불안한 상태에도 안주할 수 있다. 나는 그것을 대학 시절 한 심리상담을 하는 언니를 통해 알게됐다. 상담을 하러 오는 사람중에 어떤 사람들은 우울감을 느껴서 오는 게 아니라 우울의 습관을 가지고 온다고. 우울한 상황을 탈피하려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상태에 안주한다고. 스스로 그 우울감을 헤어나오려 하지 않고 오히려 우울한 자신을 즐긴다는 것이다. 삶의 중요한 것들을 놓치고 있는 지도 모른 채. 불안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불안의 상태에 안주하지 않는 것. 급하지 않되 부지런히 정진하는 것. 쓰러지거나 다친 자리에서 다시 뿌리를 내서 딛고 살아내는 것. ‘소크레티아 엑소리자’처럼 한 번 더 더 멀리, 더 깊이 내 팔을 뻗어보리라. 오늘의 불안이 내일의 단단함으로 변모할 때까지, 그 모양 어떤 모습일지 아직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불안함 속에 머무르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다.
글에 등장하는 노래
시작- 가호 (이태원클라쓰 ost)
https://www.youtube.com/watch?v=6LDg0YGYVw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