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없이는 못살아 - 윤종신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안도현)
라디오 프로그램을 제작하면서 이 시구는 수없이 보았다. 작가들이 즐겨 쓰는 오프닝 멘트나 클로징 멘트로 자주 등장했지만, 정작 나는 깊이 공감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이 시구에 마음을 빼앗겼는지.
방송 제작자로 살면서 놓쳐버린 순간들이 있다. 더 도전적인 프로그램을 시도해볼 걸, 그때 그 상황에서 다른 말을 해볼 걸, 선후배 관계에서 다른 방식으로 노력해볼 걸. 이런 아쉬움은 어른에게 습관처럼 찾아오는 감정이다. 그리고 그 아쉬움은 자신에 대한 불만족이 되고, 앞으로 무엇을 하더라도 잘해낼 수 있을지 확신을 갉아먹는 불안감이 된다. 이제 라디오 PD를 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 때면, 지나온 시간 속 미완의 순간들이 마치 먹다 만 과일처럼 찝찝하게 남아 나를 괴롭힌다.
어제, 내가 운영하는 무인카페에서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커피 머신이 갑자기 셧다운된 것이다. 온수가 나오지 않더니 급기야 전원이 나가버렸다. 망연자실한 채로 이리저리 전화를 돌려보았지만, 내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본사 기술팀은 내일 가봐야 출장 일정을 잡을 수 있다고 했다. 최소 3일은 정상 운영이 어려울 수 있다는 뜻이다.
손님들이 문을 열었다가 기계 고장이라는 안내문을 보고 돌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내 마음도 타들어갔다. 24시간 무인카페를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문을 닫아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늘 이 시간에 자격증 공부를 하러 오던 단골이 들어왔다.
"지금 기계가 고장이라 음료는 살 수 없는데 혹시 공부하다 가고 싶으면 하다 가셔도 돼요."
그 친구는 반가운 얼굴로 자리에 앉아 공부를 시작했다. 잠시 후 걷기 운동을 마치신 듯한 아주머니 두 분이 들어오셨고, 같은 설명을 드리자 한 분이 말씀하셨다.
"사장님도 속 타시겠네."
"네, 어쩌겠어요. 그런데 계속 오셔서 공부하는 친구들도 있고 하니까 가게는 열어두고 있어요."
그러자 두 분은 잠시 이야기를 나누시다가 "다음에 또 올게요"라고 말씀하셨다. 그 다정한 한마디가 '다음번에 와서 꼭 커피 마시러 올게요'라는 약속처럼 들렸다.
저녁이 되어 평소처럼 바닥 청소와 테이블을 정리했다. 까만 화면으로 변한 커피 머신을 마주 보며 앉았을 때, 답답함과 서러움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본사는 왜 이렇게 늑장 대응을 하는 걸까. 처음엔 남 탓, 그 다음엔 자책하다가 현실적인 고민이 시작됐다. 밤새 나가는 전기세와 난방비를 생각하면 문을 닫는 게 맞을까.
그때 낮에 만난 사람들이 떠올랐다. 매일 밤 이곳에서 공부하는 이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까짓 망할 거면 크게 망하자. 어차피 내 마음대로 되는 것도 없는데 이것만큼은 내 맘대로 하자.'
나는 기계 앞에 이렇게 썼다.
"고객 여러분,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현재 기계 고장으로 음료 제조가 어렵습니다.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정상 운영이 가능하도록 하겠습니다. 지켜보는 점주의 마음도 애가 타지만, 평소 찾아주시는 고객분들을 위해 저희 매장은 계속 열어두겠습니다. 음료는 없지만 장소를 이용하고 싶으신 분들은 머물다 가셔도 괜찮습니다. (난방 중입니다. 에어컨 리모콘은 왼쪽 책장 두 번째 칸에 있습니다.) 모쪼록 편안한 하루 보내세요. 곧 맛있는 음료로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나는 뜨겁지는 않더라도 따뜻하기로 했다. 방송할 때처럼 미진했던, 먹다 만 사과 같은 찝찝함을 이번에는 남기고 싶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와 11시가 넘어 CCTV로 가게를 확인했을 때, 한 남성분이 내 안내문 아래에 포스트잇을 붙이고 있었다. 다른 자리에서는 여전히 학생들이 공부를 하고 있었다.
다음 날, 나는 그 포스트잇부터 확인했다.
"편안하게 머물다 갑니다. 기계 잘 고치시길 바라요. 다음에 또 오겠습니다."
진심이 통한 느낌이었다. 비록 어제의 영업이익은 '0'이었지만, 나는 이 카페를 운영하면서 마음만큼은 뜨거워져가고 있었다. 때로는 눈에 보이는 매출보다도 그 일을 하면서 느끼는 마음의 온도가 우리를 움직이게 한다.
방송을 하면서, 또 카페를 운영하면서 느낀 것이 있다. 습관처럼 찾아오는 지난날의 아쉬움이라는 감정은, 오늘을 뜨겁게 사는 것으로 해소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망하더라도 크게 망하겠다는 마음으로 진심을 쏟다 보니, 불안이 자리 잡았던 한구석에 새로운 자신감이 찾아왔다. 최선을 다했기에, 그 시간 동안 배웠기에 앞으로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 같다.
세상이 버거워서
나 힘없이 걷는 밤
저 멀리 한사람 날 기다리네
아무도 나를 찾지 않아도
(그대 없이는 못살아, 윤종신)
나는 ‘연탄재’ 시구를 볼 때면 윤종신의 ‘그대 없이는 못살아’ 노래가 떠오른다. 이 노래 속 ‘그대’가 마치 뜨겁게 자신을 태워 사랑하는 연탄같아서. 세상에 지쳐 자책하며 걷는 주인공을 기어코 행복하게 해주고 마는 ‘그대’라는 사람처럼, 그리고 ‘연탄’처럼 나는 이제 무슨 일이든 내 마음을 다 쏟아볼 생각이다. 어떤 일에든지. 불안이 비집고 들어올 틈 없이. 누군가 나처럼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면 말하고 싶다. 나도 어떤 결론이 날지 모른다. 하지만 무슨 일이든 다 쏟아보기로 하니 비로소 무서울 게 없어졌다.
글에 등장하는 노래
그대 없이는 못 살아 - 윤종신
https://www.youtube.com/watch?v=5DXNXyodQx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