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 - 최유리
"길을 터 보일게 나를 베어도 돼
날 지나치지마 날 보아줘
나는 널 들을게 이젠 말해도 돼 날 보며" (최유리-숲)
최유리의 '숲'을 들으면 나는 내 고향집에서 맞던 새벽이 떠오른다. 마치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자신을 내어주면서도 "날 지나치지 마, 날 보아줘"라고 속삭이는 이 노래는, 우리를 품어주는 자연의 모습 그대로다. 아마도 최유리도 나처럼 숲에서 위로받은 적이 있었기에 이런 가사를 쓰지 않았을까.
어린 시절부터 나는 내가 시골에서 자란 게 좋았다. 그리고 지금도 마음 한 켠에는 대문을 활짝 열어 둔 채, 거실 안까지 들어온 초여름 햇빛에 아무런 경계없이 엄마도 나도 거실에서 낮잠을 자던 그때가 그립다.
나는 산이 많고, 약초향이 나는 작은 동네에서 태어나 19년을 살았다. 내가 유년기를 보낸 고향집 내 방에는 유난히 큰 창문이 있는데 한쪽 벽의 가로를 다 채울 정도로 넓은 창이다. 부모님은 그 앞에 널따란 책상을 놔주셨는데 그 책상에 앉으면 저 멀리 앞산의 광경이 한눈에 들어오곤 했다. 서늘한 우풍에 책상에 앉을 때면 늘 수면양말을 껴신어야 했지만 어쩐지 한눈에 들어오는 산의 풍경이 수험생 시절 내내 내 정신을 또렷하게 만들었다. '노력하면 다른 세상을 경험할 수 있을 거라고.' 말하며.
새벽녘 보랏빛 세상 저 멀리 산 위에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그리고 서서히 밝아지는 하늘, 바빴다가 잦아지는 새 소리, 일터로 나가는 경운기 소리, 자리가 높은 트랙터를 타고 우리 집 담을 지나가시는 동네 아저씨 모습. 처음 서울에 올라와서 한동안 아침마다 떠오르던 광경이었다. 이런 아침 풍경은 마치 하루를 시작하는 나를 응원하는 것만 같았다.
그 산은 내 삶의 일부였다. 중학교 시절 속상할 때 올라가 마을을 내려다보던 곳에서 나는 가장 중앙에 있는 우리 집을 바라보았다. 그 시절 아버지가 편찮아 위태로웠던 짠한 우리 집을 쳐다보다 울기도 했고, 어느새 조용히 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했다.
아버지가 힘이 넘치시던 시절, 그 산은 과수원과 약초 재배를 하던 곳이었다. 아버지는 그 산에 원두막을 뚝딱 짓기도 하셨고, 언젠가 그 산에는 우물도 있었다. 지금은 폭우와 객토로 원두막과 우물도 사라졌지만, 사과나무 아래 아버지와 우리가 함께 찍은 흑백사진은 그 어귀에 있던 우물까지 떠오르게 한다.
그래서일까. 나는 아직도 고향집에 내려가 그 방에 누우면 그 방의 '우풍'이 싫진 않다. 그 산에서 내려오는 서늘함을 맞으며 또렷해졌던 나. 그때 그 시간이 떠올라서다. 그리고 그 산을 바라보면 아직도 어쩐지 마음 한 켠이 투욱- 내려놓아진다. 나를 다 아는 내 어릴 적 동네 친구가 그동안 잘 지냈냐며 날 맞아주는 것 같다.
어느 날인가. 서울에서 사람이 너무 싫어지던 즈음이었다. 직장 내에서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고, 그럴수록 나만의 세계로 빠져들던 시간이었다. 어떻게 하면 직장 내 사람들과 잘 지낼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결국 혼자 인왕산을 올랐다. 부지런히 올라 앉은 정상에서 삐죽빼죽 솟은 건물을 보는데 문득 우스워보였다.
'기를 쓰고 올라봐야 도토리 키재기네’
왜인지 자꾸 웃음이 났다.
산밑에서는 위압감마저 들던 건물들이 고만고만한 성냥갑처럼 놓여져 있는 풍경. 그 모습을 보자 마음 한켠이 차분해졌다.
'뭐 그렇게까지 애쓸 필요있나, 자연스럽게 내버려둬야지. 어차피 기를 써봐야 도토리 키재기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았는지 깨달았기 때문일까. 나는 산을 오를 때와는 달리 떨리는 허벅지로 경쾌하게 마음으로 내려왔다. 그렇게 내려 온 산을 뒤돌아보니 사람이 알지 못하는 내 마음을 산이 받아 준 느낌. 우직하게 여린 내 마음을 지켜봐 준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산은 내게 말했다. '까짓 별거 아니다.'라고.
요즘도 나는 힘들 때면 자연으로 간다. 때로는 한강변 산책로를 걷기도 하고, 때로는 난지한강공원 잔디밭에 앉아 하늘을 보기도 한다. 그러면 그곳에는 사람같지 않은, 변함없는 친구가 다 안다는 듯, 여린 나를 다독인다. KPI에 쫓기고, 업무 성과에 얽매이고, 끊임없는 경쟁 속에 지친 우리에게 자연은 여전히 그렇게 "날 보아줘, 나는 널 들을게"라고 말을 건넨다. 최유리의 노래처럼, 우리의 불안을 녹여주는 자연이 있어 다행이다.
(글에 등장하는 노래)
숲- 최유리
https://www.youtube.com/watch?v=7ihLv8_Vd-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