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하-지난날
언제 어디 누가 이유라는 탓하면 뭘 해
잘했었건 못했었건 간에
그대로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어
세상사람 얘기하듯이 옛 추억이란 아름다운 것
- 유재하 '지난날'
몇주전 갑자기 자동차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양가 부모님이 계신 지방이며 가족끼리 서울 외곽을 참 부지런히 달리던 차였다. 남편 말로는 십만키로를 탔다는데 이제 백곰(처음 차를 샀을 때 너무 기뻐서 우리는 백곰이라는 이름을 지었다)도 힘이 부치나보다. 결국 꽤나 비싼 돈을 내고 차 엔진부터 여러 곳을 수리했다. 그리고 차를 수리하는 동안 어린 아이들과 함께 다닐 때는 택시를 타야 했다.
하루는 남편과 아이들과 함께 택시를 탔는데 남편이 기사님에게 먼저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기사님은 퇴직 후 택시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됐다고 하셨다. 어쩐지 차량이 새차처럼 깨끗했다. 몇 차례 이런 저런 말을 나누다가 평소 그 길을 많이 다녀 본 남편이 '저기 앞까지 가셔서 끼어들기 하시면 더 빠르다'라고 했더니 기사님은 사람 좋은 얼굴로 이런 말을 하셨다.
"택시 운전하면서 가장 당황스러울 때가 급한 손님 태웠을 때에요. 한번은 한 여학생이 사색이 되가지고 타더니 가는 내내 뒤에서 뭔가 불안해요. 통화를 하는데 뭔가 심각하고. 뭔가 물어봤더니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엄마가 서울에 일보러 나온 사이 심각하다고 집에서 연락이 왔다는 거에요"
그때 그 길을 어떻게 운전을 해서 갔는지, 식은땀을 흘리며 달려갔는데 나중에 손님에게 연락이 왔다고 한다. '엄마, 나왔어' 하고 집에 발을 들여놓는 직전에 어머니가 눈 감으셨다고.
"제가 그 얘기를 듣고 진짜 인생이 뭘까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요"
그러시며 웃으며 하는 말씀,
"내 맘이 급해도 어떻게 합니까. 도로가 이런데."
그 이야기를 듣고 어쩐지 머쓱해졌는지 남편은 운전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뒤에서 그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묘하게 조금 전 기사님의 그 말이 귓전에 맴돌았다.
'내 맘이 급해도 어떻게 합니까. 도로가 이런데...'
내 맘 같지 않은 상황. 내 맘 같지 않은 사람. 내 마음은 아무리 타들어가도 상황이 안되면 정말 어쩔 수 없을 때가 있다. 사람도 내 사람이 아니면 아무리 애를 써도 어려운 것처럼. 차 안에 갇혀 몇시까지 어딜 가야하는데 안달해봐야 도로는 내 마음을 모른다. 그럴 땐 차라리 기사님처럼 너털웃음으로 웃어버리는 게 방법이 되지 않을까.
유재하의 노래 가사처럼, "잘했었건 못했었건 간에 그대로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상황이 내 맘대로 되지 않더라도, 그것 자체로 의미가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는 것이 삶의 지혜가 아닐까.
아침이슬을 부른 양희은씨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엄마의 빚보증과 양장점 화재로 기운없고 희망도 없는 십대를 보냈다. 20대, 30대가 되어서도 조그만 일에도 심장이 철렁 내려앉고 모든 순간마다 흔들렸다고 한다. 그러다 50이 되어서야 '그러라 그래' 넘길 수 있는 여유가 차차 생겼다고 하는 그녀는 이런 제목의 책을 낸 적이 있다.
"그러라 그래. 그럴 수 있어. 나도 그럴 수 있어"
뚫린 도로를 담담하게 받아들기 시작한 그 기사님처럼 살면서 답답했던 상황들, 소통이 안 돼 답답했던 사람들, 심지어 내 자신이 나에게 화나는 순간에도 '어쩌랴, 그러라 그래', '그럴 수 있지' 하면 어떨까 싶다. 인생이란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는 거니까. 그렇게 보면 안정적일 줄 알았던 내 직장에서 6개월 간 월급이 밀리고, 190명의 동료가 떠나는 상황도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는 인생에서 유난스럽지도 대수롭지도 않은 일일수도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인생이 본래 그런 거라면...'
고개를 돌려 밖을 보니 한강에 윤슬이 반짝이고 있었다. 비록 꽉 막힌 도로처럼 인생이 내 맘 같지 않더라도 조금만 고개를 돌려보면 예상치못한 기쁨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듯이.
(글에 등장하는 노래)
지난날-유재하
https://www.youtube.com/watch?v=0_ZJfwM2bM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