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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꼬르륵 Aug 05. 2021

며느리 가출사건 1.

경상도 시어머니와 서울 며느리의 공동육아기록

금요일 밤, 다들 비교적 기분이 좋았다. 나는 토요일과 주일에는 남편이 함께 한다는 사실에 육아 부담이 덜어서 좋았고, 주말마다 집에 내려가시는 어머니는 주말에 쉴 수 있다는 사실에 좋으셨고, 남편은 어머니와 내가

편안해 보여서 마음이 안정이 됐을 것이다. 주말 밤새 깰 둘째를 남편과 내가 교대로 볼 일이 남아있었지만 그래도

불금이니까 마음이 가벼웠다. 그렇게 여유로운 금요일 밤을 보내며 둘째를 목욕시키는데 사건이 터졌다.


다음날 새벽에 운전을 해서 내려가셔야 하는 어머니는 첫째 아이를 데리고 건너방으로 가시고, 남편과 내가 둘째를

목욕시키기 시작했다. 신생아는 아직 너무 어리고 온도 변화에 민감하기 때문에 안방에서 작은 대야에 따뜻한 물을

담아 와 씻기는데 아기가 배가 고파서 울기 시작했다. 워낙 울음소리가 우렁차 건너방에서 잠이 들고 있던 첫째가 깨서 아장아장 거실을 지나 안방 문을 열어젖혔다. 자기보다 더 작은 아기를 목욕시키고 있는 장면을 첫째가 놓칠 리 없었다. 첫째는 겁 없이 다가왔고 뒤따라 어머니가 첫째를 잡으러 들어오셨다.


남편은 서둘러 목욕을 마치는 데 여념이 없었고, 나는 옆에서 다 씻긴 아이를 받아서 닦이고 옷을 갈아입히려고 준비 중이었다. 허기진 아기의 울음소리가 계속 커져서 나는

"어머니, 혹시 희망이 분유 80만 타 주실 수 있으세요?"

라고 어머니께 여쭤봤다. 첫째는 다 쓴 물에 손가락을 넣고 물장난에 여념이 없었지만 비교적 얌전했다.

그런데 갑자기 남편,  


"네가 하면 되지 왜 어머니한테"


순식간에 튀어나온 말이었다. 그러자 어머니는

"아, 무슨 말인지 알았어. 내가 타 올게"

하시며 자리에서 일어나셔서 부엌으로 향하셨고,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불쾌한 기분이 올라오면서 어머니께서 들으실까 봐 낮은 목소리로 남편에게 말했다.

"당신은 씻기고 있고, 나는 아이 받아서 바로 닦이고 옷을 입혀야 되고, 애는 배고파서 울고, 옷 입히자마자 애한테

밥을 먹어야 되는데 그거 부탁드리는 게 그렇게 예의에 어긋난 거야?"

그러자 남편은

"아니, 나한테 하라고 하면 내가 하는데... 어머니 주무셔야 되는데"

"지금 당신이 씻기고 있는데 어떻게 당신이 해. 그리고 어머니가 주무시는데 깨워서 부탁드린 거야? 마침 앞에 계시고 상황이 그러니까 그런 거잖아!"

"조용히 "

"...."

그 상황에서 그저 어머니가 듣게 되실까 봐 그것만 걱정하는 남편이었다. 사실 며칠 전에도 남편이 내가 어머니께

통보하듯 말했다고 해서 기분이 상했던지라(실제로 전혀 그렇지 않았고, 남편은 결국 사과했다.) 아니면 산후 호르몬의 영향인지 나는 점점 더 화가 났다.

"뭘 조용히 해! 내가 지금 틀린 말해?"

"아, 좀 조용히 하라고!"

남편은 소리쳤고, 급기야 모른 척하려야 모른 척할 수 없는 소리가 들리자 어머니는 남편에게

"힘이 들고 짜증이 나면 그냥 조용히 들어가서 자. 지금 너 한 사람 때문에 집안에 평화가 얼마나 깨지는 줄 아나?!"

라고 소리치시는 거 아닌가. 나중에 생각해보니 남편이 퇴근하고 현관에 들어서며 어머니께 왜 유모차를 접어놓지 않았느냐고 짜증을 냈었다. 어머님도 기분이 안 좋으셨을 것이다.


정적이 흘렀고, 조용히 목욕 뒷정리를 하고, 남편은 서재에 , 나는 침실에, 어머님은 다른 방에서 첫째와 잠자리에 드셨다. 그런데 도통 잠이 오질 않았다. 나는 그래도 너는 우리 엄마한테 그러면 안된다는 식의 남편의 태도가 너무 황당했고, 실제로 그렇지도 않았는데 유난스럽게 그러는 것도 억울하고 화났다. 그리고 나도 산후조리기간 아닌가. 임신 중에도 10kg는 첫째를 안고 씻기며 그렇게 고생을 하고, 이제 막 둘째를 낳고 집에 돌아왔는데 나한테 이런다고?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살면서 남편에게 서운했던 사소한 일까지 다 떠오르며 서러움에 서러움이 더해져 눈이 붓기 시작했다.


'낮에 애를 보려면 지금 자야 하는데... 하... 이 상황에서도 내일 다시 얼굴을 마주 보며 애를 봐야 되는구나... 어머니는

새벽에 내려가실 테고...'


2시간,,,3시간을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며 뒤척이는 동안 거실에서는 남편이 군말 없이 둘째가 울면 분유를 타 먹이고 트림을 시키는 소리가 들렸다. 혼자 감당을 하는 걸 보니 참회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서러운 감정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집에 있기 싫었다. 남편도 싫었고, 자꾸만 내게 예의 있게 하라니 어머니도 어렵고, 내 집이 내 집이 아닌 것 같고,

답답하고, 남편과 어머니 사이에 남의 식구인 내가 끼인 것 같았다. 좀처럼 잠은 오지 않고, 새벽 3시 반이 다 되어갈 즈음 정말 어디 가서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답답함에 나는 겉옷을 챙겨 입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용히 거실을 나와 현관문을 열었다.


그때 뒤에서 "여보..."하고 부르는 남편의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재빨리 냅다 문을 닫고 나와버렸다.

 

거리는 깜깜했다. 무서웠지만 집에 들어가기는 더 싫었다. 그렇게 편의점을 갔다가 다시 집 앞으로 갔다가 다시

편의점을 갔다가 집 주변을 돌며 다시 들어갈까도 생각했지만 정말 남편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고심 끝에

택시를 불러 타고 집 근처 호텔에 전화를 걸어 당장 묵을 수 있는 방이 있는지 확인하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방이 있었고

쾌적한 호텔방에 도착해 샤워를 하고 나오니 새벽 6시였다. 그 후로도 한참 동안 아이 걱정, 서러움에 울다가 어느 순간

잠들었다. 핸드폰을 꺼버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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