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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꼬르륵 Aug 06. 2021

며느리 가출사건 2

경상도 시어머니와 서울 며느리의 공동육아기록

한번 당해 보라는 심정도 있었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지. 내 생사를 걱정하며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살아봐라. 아니면

어머니가 새벽에 나가실 때 내가 없다는 말도 못 하고 내려보내드리고 하루 종일 애 둘 보며 고생해봐라.


그런데 혹시 남편이 나를 찾는다고 엄마나 우리 가족에게 연락을 하면 어쩌나. 남편이 고생하는 건 샘통인데 애들이

힘들면 어쩌나. 어머니가 나 때문에 못 내려가실 수도 있는데 어쩌나.


이 생각 저 생각 심란했다. 그런데 그래도! 집에는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결국 억지로 잠을 청하며,

휴대폰을 켜지 않기 위해서 TV 속 봤던 영화를 보고 지난 예능 프로그램을 보며 버텼다.


그리고 오전 11시경 잠시 휴대폰을 켜자 때마침 언니에게 전화가 왔다.

"너 어디야?"

다짜고짜 언니가 물었다.

"나? 호텔"

"아이고. 매부한테 전화 왔었다. 혹시 너 우리 집에 왔냐고. 왜 그래, 싸웠어?"


울산에 있는 언니 집에 도대체 어떻게 간다고. 쳇. 언니한테 말했다 이거지. 나는 간밤에 있었던 일을 모두 언니에게 털어놨다. 애가 셋이고 시댁 근처에 사는 언니는


"야. 이왕 이렇게 된 거 너 거기서 푹 쉬다 가. 맛있는 거 시켜먹고. 매부한테는 나도 모르겠다고 연락 오면 알려주겠다고 할 테니까. 그리고 엄마, 아빠한테는 연락은 안 했으면 좋겠다고 할게. 쉬어 쉬어"


그렇게 언니와 통화 후 바로 휴대폰을 꺼버렸고, 꾸역꾸역 버티다 오후 3시쯤 나는 호텔을 나왔다.


그리고 택시를 타고 집 근처 한강공원에서 내려 걷기 시작했다. 강아지를 데리고 온 사람들, 다정한 연인들, 운동하는 사람들. 따뜻한 햇살 아래 평화로운 사람들을 보니 조금씩 마음이 차분해지기 시작했다. 나의 결혼생활, 앞으로의 결혼생활, 지금 나의 생활을 생각하며 내 감정을 돌아보고 주변 사람들의 상황과 감정도 생각해봤다. 그리고 두 아이. 아이들이 계속 떠올랐다.


감정이 풀리지 않으면 하루 더 호텔에서 자겠다는 모진 마음도 먹었었는데 저녁 8시가 되었을 즈음 결국 나는 현관문 앞에서 비밀번호를 누르고 있었다. 문을 열자 어머니가 보였다. 둘째를 안고 계셨다. 집에 내려가지 못하신 것이다.


어머니는 나를 보시자 웃으며 "바람 잘 쐤어?" 하셨다. 그런데 나는 왠지 어머니가 그렇게 해주실 것 같았다. 어머니는 몇십 년을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며 얼마나 답답한 나날을 보냈었는지 이야기하시곤 하셨다.


그리고 건넌방에서 첫째를 재우고 있었는지 남편이 조용히 문을 열고 나를 보더니 다시 조용히 문을 닫았다. 침실에 들어와 비행기 모드를 끄고 데이터 연결을 하니 남편의 부재중 전화 기록들이 떴다.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쳇, 뭐 그런가 보다 하며 어머니와 별일 없었다는 듯이 애가 기저귀를 방금 갈았네, 오늘 몇을 먹었네 하며 밤을 맞았다.


그리고 다음날, 우리 셋이 속에 있는 이야기를 하고 풀자는 어머니의 조심스러운 제안에 나는 남편에게 이런 점이 서운했었노라며 나도 밖에서 편하게 있질 못했노라며 어머니와 함께 생활하기 시작하면서 이런 부분, 저런 부분이 조심스러워 답답했었노라며 처음으로 속마음을 털어놨다. 남편도 퇴근 후 집에 와서 또 육아를 해야 된다는 것에 부담이 되고 지쳤노라며 그래서 어머님께도, 나에게도 별 거 아닌 일에도 예민하게 굴고 오해했노라며 사과를 했다. 어머님도 한 달간 우리를 보며 애들이 그동안 많이 지쳤구나 느꼈노라며 어제 일은 한편으로는 서운했지만 며느리 심정도 이해가 갔노라며 다독이셨다.


그렇게 한바탕 폭풍이 지나간 자리에 천만 다행히도 '그래 너도 얼마나 힘들었으면...' 하는 측은지심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건 어머님께서 솔선수범하시지 않았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리라.


이틀이 지나고 하루 종일 통화가 안됐던 이유를 묻는 엄마의 추궁에 나는 결국 모든 일을 엄마에게 다 털어놨고, 엄마는 다 그렇게 산다며 허허 웃었다.


그래서 나의 가출사건은 다 그렇게 사는 걸로, 그럴 수도 있는 걸로 얼추 아름답게 마무리가 되었다. 아름다운 질풍노도의 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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