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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는 엄마는 예쁘다

'요즘 나는 내가 식충이가 된 것 같아요'. 우리를 먹먹하게 한마디

by 꼬르륵

"요즘 나는 내가 식충이가 된 것 같아요..."

첫 모임, 우리를 먹먹하게 한 참여자의 한마디


하지만 우리는 ‘꽃’이자 아직 열지 않은 '초콜릿 상자’


지난 월요일 오전 10시 30분, 나는 평소와 달리 우리 부부가 운영하는 무인 카페에 와 있었다. 오전 9시, 집 앞에서 여섯 살, 다섯 살 아이들을 유치원 버스에 태워 보낸 후, 걸어서 8분 거리인 카페를 빠른 걸음으로 5분 만에 왔다.


내가 발걸음을 재촉했던 이유, 몇 분 후면 바로 내가 만든 독서 모임 ‘책 읽는 엄마는 예쁘다’를 시작해야 했기 때문이다.


첫 모임 때 무엇을 하면 좋을지 생각하다가 고른 책은 이 모임의 취지와도 결이 맞는 『김미경의 마흔 수업』이었다. 사실 나는 자기계발서를 좋아하진 않는다. 몇몇 자기계발서가 개인의 기질과 환경의 차이를 가볍게 보고 지나치게 경쟁 구도로 몰아넣는 느낌을 받기도 했고, 자기 계발 방식이 획일화되는 것에도 거부감을 느끼곤 했다.


하지만 내가 이 책을 고른 이유는 나처럼 이제 ‘마흔’을 맞은 모임 어머니, 그리고 ‘마흔’을 넘어 ‘쉰’을 향해 가고 있는 다른 두 어머니에게 “우리는 아직 많은 가능성을 갖고 있어요”, “마흔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에요”라는 메시지를 건네고 싶었기 때문이다.


봄을 맞은 오전은 어느 때보다 화창했고, 우리 부부가 운영하는 카페의 커피는 사장인 내가 먹어도 맛있었다.

어머니들을 기다리며 잠시 커피를 마시며, 첫 오리엔테이션 자료를 다시 살펴봤다.


첫 오리엔테이션 모임에서 함께 나누기 위해 만든 질문들. 짧은 시간이지만 서로에 대해 알 수 있는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잠시 후, 첫 모임에 참여하기로 한 세 분의 어머니가 오셨다. 우리는 어색하게 마주 앉아 커피를 마시며 인사를 나눴다. 하지만 얼굴에는 다들 기대감이 엿보였다. 전단지를 보며 뭔가 새로운 도전을 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 신청했다고.




‘책 읽는 엄마는 예쁘다’ 전단지. 나는 이 인쇄물을 우리 부부가 운영하는 카페에 붙였고, 총 네 분의 어머니가 신청해 왔다.


“살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인가요?”,


“살면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언제인가요?”


우리는 이 두 가지 질문에 조심스럽게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 놓기 시작했다. 나는 유년기, 청소년기, 장년기, 삶의 시기마다 고비들이 있어 왔다고. 그래서 요즘에는 남편과 아이들과 무탈하게 하루를 지내고, 다 함께 저녁을 먹은 후, 거실에 편하게 눕거나 앉아 과일을 먹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말했다. 그 말을 하며 지난 저녁, 아이들이 내가 차린 저녁상을 배불리 먹고, 샤워를 한 후, 거실 소파를 뒹굴며 파란 샤인머스캣을 하나씩 따 먹던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아이들의 샴푸 냄새, 샤인머스캣 열매를 양 볼에 넣고 빵빵해진 사랑스러운 둘째의 얼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들이었다.


그러자 두 어머니는 살면서 자신의 결혼식이 가장 행복했다고 고백했다. 원래도 흥이 많아서 남편의 친구들이 축가로 박진영의 ‘허니’를 준비했는데, 신부인 자기가 너무 흥이 나서 같이 췄다고. 늘 부모님으로부터 독립을 바라 왔는데 그 순간 해방감과 동시에 남편에게도 콩깍지가 제대로 씌여 있을 때라 “드디어 이 남자가 내 남자다!”라는 성취감에 취해 있었다고. 그래서 아직도 결혼식만 생각하면 너무 행복하시단다.


또 다른 어머니 역시 개그맨 출신 남편의 친구들이 결혼식에서 다들 어찌나 자기 끼를 발산하려고 하던지, 웃겨서 너무 즐거웠었다는 고백을 했다. 마지막으로 이제 ‘쉰’을 앞둔 어머니는 결혼을 늦게 하고, 아이도 늦게 낳았는데 노산이라 주변에서도 너무 많은 걱정을 하고, 임신 과정이 쉽지 않았던지라 아이가 건강하게 잘 태어난 날이 살면서 가장 행복했노라고 고백하셨다.


결혼식이 어색하고 분주했던 나와는 전혀 다른 경험을 한 두 어머니의 이야기와 아이에 대한 모성애가 느껴지는 어머니의 나눔으로 모임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어색한 기류는 모두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우리는 다음 질문, “살면서 가장 힘든 순간은 언제인가요?”라는 질문에 답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내 맞

은편에 앉은 어머니, 순식간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저는 사실 미국에서 들어온 지 지금 몇 달 안 됐어요. 제가 미국에서 간호사로 일을 했는데 대신 남편이 저 대신 두 딸을 거의 혼자 키웠거든요. 그런데 남편이 이제는 자기도 하고 싶은 걸 해 보고 싶다고 해서 한국 시댁으로 갑자기 온 가족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어요. 직장도 그만두고, 육아도 제가 하던 게 아니고, 어제는 어머니가 하신 밥을 먹고 있는데 제가 ‘식충’이가 된 것 같더라고요.”


“....”


그런데 시누이는 요즘 갑자기 직장까지 그만두고 오면 어떻게 하냐며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고, 남편마저 자기 일에 몰두하기 시작하면서 어머니는 사실 외롭다는 고백을 했다. 그렇게 스스로 자존감이 너무 떨어지고 있는 상황이라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김미경의 마흔 수업』을 읽는데, 첫 장부터 눈물이 나시더란다. 다들 마흔이 넘으면 뭔가 되어 있을 줄 알았지만, 그렇지 않아도 전혀 이상한 게 아니라는 것. 오히려 당연한 거라는 저자의 말이 참 위로가 됐다면서.


사실 요즘 나 역시 그랬다. 안정적일 줄 알았던 회사의 위기, 갑작스러운 휴직, 타의에 의해서 멈춰 선 후, 지금 내 조건에 사회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돌아보니 예상했던 것보다 ‘30대 초반 나이’는 엄청난 경쟁력이었다. 그리고 두 아이가 있는 가정과 직장생활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은 엄청난 전제조건이었다. 그래서 나는 꼭 직장생활만이 해결책이 아닐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오히려 현실을 받아들이니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에 집중할 수 있어서 좋기도 했다. 나와 똑같은 상황은 아닐 수 있지만, 어쩐지 어머니의 이야기가 남 이야기 같지 않았다.


나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니었나 보다. 우리는 모두 함께 눈시울이 붉어지며 너나 할 것 없이 “식충이라니, 그렇지 않아요. 그동안 열심히 일해서 가족을 부양하셨잖아요” 등등 위로를 건넸다.


그렇게 서로가 힘들었던 순간들마저 나누자 1시간 20분을 예상했던 첫 모임은 1시간 40여 분이 넘어서야 끝났다.


우리는 첫 책 『김미경의 마흔 수업』을 다음 모임 전까지 모두 읽고, 다음 시간에는 직접 손으로 독후감을 써 보기로 했다. 그리고 나는 다음 시간에는 각자가 모임을 하는 동안 이루고 싶은 것을 정해 보고, 응원하는 시간을 만들어 보려고 한다.


첫 모임을 정리하는 글을 쓰는 지금, 다시 “제가 식충이가 된 것 같아요”라며 눈시울을 붉히던 어머니의 얼굴이 떠오른다. '차차 언니라고 불러 봐야지....', 그런 재밌는 상상과 함께 '언제 그런 생각을 했나 싶을 정도로 멋지게 변할 수 있도록 내가 도와줘야지! 나도 그렇게 돼야지!' 의지가 샘솟는다.


왜냐면 나 역시 그런 바닥 같은 시간을 겪어 봤으니까.


마흔을 맞은 여자도 여전히 아름답다는 것을, 그리고 아직 열지 않은 초콜릿 상자처럼 달콤한 인생의 순간들이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을, 나는 이 모임을 찾은 언니, 친구들과 앞으로 더 많이 느껴 볼 생각이다.

역시 일은 벌리면 벌릴수록 재밌다.


책엄쁘(책읽는 엄마는 예쁘다), 화이팅! 엄마들,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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