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넌 지금 어디 있니? - 시간을 가로지르는 그리움

천피디의 이븐한 음악일기 #7 - 윤상, 가려진 시간 사이로

by 꼬르륵

1992년 가요계는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랩으로 12주 연속 1위를 기록하며 새로운 장르를 열어가고 있을 때, 한편에서는 신승훈과 김건모가 발라드의 정점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1991년 데뷔한 윤상은 전혀 다른 결을 보여주었다. 모든 것이 빨라지고 강해지는 시대에, 그는 조용하고 내성적인 음악을 선택했다.


[윤상 - 가려진 시간 사이로]

https://www.youtube.com/watch?v=dFooSjia-ls



시대를 거스른 선택

"노는 아이들 소리 저녁 무렵의 교정은 아쉽게 남겨진 햇살에 물들고..."

1992년에 이런 서정적인 가사를 쓴다는 것은 분명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모든 기획사가 변화하는 트렌드에 맞추려 고민하고 있을 때, 윤상은 자신만의 음악적 색깔을 고집했다.


윤상만의 음악 언어

윤상을 단순히 발라드 가수로 분류하기엔 아쉽다. 그는 작사, 작곡, 편곡을 모두 소화하는 완성형 뮤지션이었다. 무엇보다 그의 음악에는 독특한 매력이 있다.

가사부터 다르다. "가려진 시간 사이로", "2등", "나무" 같은 곡 제목만 봐도 시적이다. 직설적이지 않으면서도 마음 깊숙한 곳을 건드리는 가사를 쓴다. 마치 일기를 읽는 듯한 사적인 느낌이지만, 동시에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성을 갖고 있다.

편곡도 특별하다. 화려한 사운드로 귀를 사로잡는 대신, 피아노를 중심으로 한 미니멀한 구성을 선택했다. 하지만 그 단순함 속에 놀라운 깊이가 있다. 마치 잘 정돈된 방 같은 느낌이랄까.

그리고 그의 목소리. 터지는 고음이나 파워풀한 창법과는 거리가 멀다. 대신 속삭이듯 부르는 보컬로 감정을 전달한다. "넌 지금 어디 있니"라는 마지막 한 마디에서 느껴지는 그 절제된 그리움이 바로 윤상다운 매력이다.


시간이 멈춘 노래

86년생인 내가 이 노래를 처음 듣고 놀란 건 전혀 낡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1992년 곡이라니, 믿기 어려웠다.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감정이 있다는 걸 이 노래가 증명한다.

"커다란 두 눈의 그 소녀"라는 한 줄이면 충분하다. 각자의 기억 속 그 사람이 떠오른다. 윤상이 부르는 건 자신의 이야기지만, 듣는 사람은 저마다의 그리움으로 받아들인다.


기다림이라는 미학

모든 것이 빨라지던 시대에 윤상은 느림을 선택했다. "넌 지금 어디 있니"라는 질문에 답을 재촉하지 않는다. 그냥 궁금해하고, 보고 싶어할 뿐이다.

요즘 같은 시대엔 더욱 귀한 감정이다. 메시지 읽씹하면 큰일인 세상에서, 윤상은 30년 전부터 "천천히 대답해도 된다"고 말하고 있었던 셈이다.


30년을 버틴 조용한 힘

윤상은 이후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2등", "나무", "예전엔 미처 몰랐었네" 같은 곡들로 자신만의 영역을 더욱 확고히 했다. 다른 가수들에게 곡을 주며 프로듀서로도 인정받았고.

지금도 '가려진 시간 사이로'는 여전히 사람들 마음에 닿는다. 유행을 따라가지 않고 자기 길을 걸어온 결과다. 1992년 그 조용한 선택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변하지 않는 것의 힘을 보여주면서.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그때는 귀한 줄도 모르고 - 시간이 흘러야 보이는 것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