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사랑은 언제 완성되는 걸까

천 피디의 이븐한 음악 일기 #8-장현, 나는 너를

by 꼬르륵

시냇물이 바다가 되는 시간

사랑은 언제 완성되는 걸까? 첫 만남의 설렘에서? 고백의 순간에서? 아니면 시간이 흘러 서로를 깊이 알아가는 그 어느 순간에서? 1972년, 한 곡이 이 질문에 아름다운 답을 제시했다.

각설하고 천 피디의 이븐한 음악 일기 여덟 번째, 시간 속에서 익어가는 사랑을 노래한 장현의 "나는 너를"이다.


[장현 - 나는 너를]

https://www.youtube.com/watch?v=OMXiR5mVVlY



신중현과 장현, 완벽한 만남

이 곡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 신중현이다. 작사, 작곡을 모두 담당한 신중현과 보컬 장현의 만남은 1970년대 한국 음악사에서 가장 중요한 협업 중 하나였다.

신중현의 서정적 감성과 장현의 깊은 음색이 만나 탄생한 이 곡은, 단순한 노래를 넘어 하나의 철학적 명제가 되었다. 사랑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의 은유로 표현한 오랜 미련

시냇물이 흘러 바다가 되듯 세월 속에서 익어간 사랑을 가슴속에 품고 있었다고 고백하는 이 곡의 화자. 솔직히 말해서, 이런 서정적 표현을 2024년에 쓴다면 좀 오글거릴 수도 있다. 하지만 1972년의 이 은유는 정말 절절하다.

더욱 아픈 건 그 뒤에 이어지는 가사다. 그토록 믿어왔던 사랑이 모두 어리석은 것이었다며 이제야 떠나간다고 선언하는 부분. 아, 이게 진짜 포인트다. 오랫동안 품고 있던 사랑이 결국 헛된 것임을 깨닫고 이제야 정리하겠다는 결심. 자연의 은유 뒤에 숨겨진 깊은 상처와 의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1970년대 록의 서정성

장현은 1970년대 한국 록·발라드 장르를 대표하는 보컬리스트였다. 당시 록 음악이 거칠고 반항적인 이미지가 강했던 것과 달리, 장현의 음악은 깊은 감성과 서정성으로 무장했다.

그의 목소리는 거칠지 않으면서도 깊었다. 외치지 않으면서도 강렬했다. "나는 너를"에서 그런 장현의 매력이 극대화되었다. 한 편의 서정시를 읽는 듯한 그의 보컬은 듣는 이들의 마음을 조용히 울렸다.


시간이 만들어내는 상처의 깊이

이 곡의 핵심은 '시간'이다. 하룻밤 사이에 끝나는 감정이 아니라, 시간이 흘러 서서히 쌓여간 마음을 노래한다. 요즘 말로 하면 '롱런 미련'의 원조격인 셈이다.

세월이 흘러 익어간 사랑이라는 표현이 특히 아프다. 사랑을 술이나 치즈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깊어지는 것으로 묘사했지만, 결국 모든 게 어리석은 것이 되어버린 아이러니. 천천히 숙성된 만큼 포기하는 것도 쉽지 않다.


철학적 사유가 담긴 가사

신중현의 가사는 단순히 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넘어서 철학적 사유를 담고 있다. 자연의 섭리를 인간의 감정에 대입시키면서, 사랑과 이별도 자연의 일부임을 보여준다.

시냇물이 바다에 머물다가 결국 다른 곳으로 흘러가듯, 사랑도 마음속에 오래 머물다가 언젠가는 떠나보내야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이치라는 메시지. 억지로 붙잡으려 하지 않고, 자연의 흐름을 받아들이는 성숙한 태도를 보여준다. 이런 철학적 깊이가 이 곡을 단순한 이별 노래가 아닌 삶의 지혜를 담은 노래로 만들었다.


요즘엔 이런 사랑이 신기해

이 노래를 들으면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유지태가 이영애를 보며 배신감에 내뱉었던 말이 떠오른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2023년 세계 7개국 300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남성이 여자친구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기까지 평균 3.5개월이 걸린다고 한다. 그런데 그렇게 시작한 사랑에서 도파민이 분비되는 열정적인 기간은 최소 3개월에서 최장 3년에 불과하다.

요즘 MZ세대는 대입, 취업, 결혼이라는 인생 과제들로 인해 연애 기간이 짧아지고 있다. 아예 연애와 결혼을 포기하거나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많다.

끊임없는 경쟁 속에서 더 나은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시대에, 누군가를 시냇물처럼 바다가 되어 머물게 할 여력이 과연 있을까.

하지만 이 노래 속 사람의 정서는 뭔가 더 순수해 보인다. 좋아하면 좋아하는 것이고, 아프면 아픈 것이고, 떠나보내야 하면 떠나보내는 것이다. 복잡하게 계산하지 않고 감정 그 자체로 살았던 시절의 순수함이 느껴진다.


라디오 부스에서 만난 이야기

이 곡을 틀어달라는 신청이 들어올 때마다 나는 묘한 기분이 든다. 대부분 40대 이상의 청취자들이 신청하는데, 그들의 사연을 들어보면 십중팔구 "오랫동안 못 잊는 사람이 있다"는 내용이다.

어떤 분은 문자로 이런 이야기를 보내셨다. "20년 전에 헤어진 사람인데, 아직도 가끔 생각이 나요. 그 사람을 위해 이 노래를 틀어주세요." 참 묘하다. 이 곡이 가진 힘인지, 아니면 시간이 지나면서 미화된 기억의 힘인지.


음악으로 남긴 사랑의 교과서

장현의 "나는 너를"은 사랑이 무엇인지, 어떻게 깊어져가는지, 그리고 때로는 어떻게 끝나가는지를 음악으로 가르쳐준다.

신중현의 곡 중에서도 특히 서정적이고 철학적인 이 곡은, 한국 록 음악의 또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록이 반드시 시끄럽고 거칠 필요는 없다는 것을, 조용해도 충분히 강렬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시냇물이 바다가 되는 시간을 기다렸지만 결국 떠나보낼 줄도 알았던 1972년의 그 사람처럼, 우리도 언젠가는 성숙한 이별을 맞이할 수 있을까. 라디오 부스에서 이 곡을 틀어주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2부 사랑이라는 이름의 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