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피디의 이븐한 음악 일기 #15 -정태춘-시인의 마을
어릴 적 나는 시를 썼다.
처음엔 수업 시간에 내준 과제였다. 시 한 편 써오라는 숙제를 대충 해냈는데, 담임선생님이 의외로 좋아하셨다. 일기 대신 시를 써도 된다고 하셨고, 나는 그걸 핑계 삼아 종종 시를 적었다. 일기장은 빽빽하게 써야 하지만, 시는 몇 줄만 써도 됐으니까. 그래도 늘 "참 잘했어요" 도장이 따라왔다.
그러다 고등학생이 된 어느 날, 우연히 초등학교에 들렀다. 그때 한 선생님이 나를 보며 말했다. "너 예전에 썼던 시 기억나? 너무 좋아서 친구한테도 보여줬었어. 계속 쓰면 좋겠다 생각했는데."
기억이 잘 나지 않아 머쓱해하다가, 그 시가 대략 이랬다는 얘기를 들었다.
달
우리 집 마당에는 달이 하나 더 있다.
엄마가 두고 간 세숫대야
거기서 나를 수줍게 보고 있다.
없어졌다, 또 있고
없어졌다, 또 있고
자꾸 나타난다.
아마도 저 달은 나를 참 좋아하나 보다.
그 후 다시 시를 써보려 했지만 전혀 써지지 않았다. 예전엔 자연을 보면서 감탄했는데, 지금은 책상에 앞에 앉아 영어 단어 외우는 데 시간을 쓰고 있었으니까. 그때 나는 뭔가 중요한 걸 잃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태춘의 〈시인의 마을〉을 처음 들었을 때 느낀 건 익숙함이었다. 그런데 곧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분명 자연을 노래하는 곡인데, 김민기의 "아침이슬"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아침이슬"이 자연 속에서 희망을 찾는 노래라면, "시인의 마을"은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일상을 그린 노래였다.
1970년대 말 정태춘이 이 곡을 발표했을 때, 한국 포크 음악은 이미 하나의 장르로 자리 잡고 있었다. 김민기가 개척한 길 위에서 정태춘은 자신만의 색깔을 찾아가고 있었다. 같은 자연이지만 접근 방식이 달랐다. 김민기가 자연에서 메시지를 읽어냈다면, 정태춘은 자연과 대화를 나누려 했다.
이 곡은 자연을 벗 삼아 살고 싶다는 화자의 마음을 담았다. 자연의 친구가 되고, 사색하는 시인이 되고 싶다는 내용으로 시작해서, 조용한 마을에서 펼쳐지는 일상적인 풍경들을 그려낸다. 지금 듣기에도 지나치게 낭만적이지 않고, 묘하게 단단한 감성이 있다.
흥미롭게도 정태춘의 초기 음반들은 공연윤리위원회의 사전심의를 받아야 했다. "시인의 마을"도 예외가 아니었다. 일부 가사가 개작되어 발표되었는데, 이 경험이 훗날 정태춘을 가요 사전심의 제도 폐지 운동에 나서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김민기가 "아침이슘"으로 금지곡의 아이콘이 되었다면, 정태춘은 좀 다른 방식으로 저항했다. 직접적인 대결보다는 끈질긴 법적 투쟁을 선택했다. 1996년 헌법재판소의 사전심의 제도 위헌 판결을 이끌어낸 것도 그런 노력의 결과였다. 지금 우리가 자유롭게 음악을 듣고 만들 수 있는 건 이런 선배들의 투쟁 덕분이다. 그런데 정작 정태춘 본인은 거창한 의미 부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그냥 자연스럽게 노래하고 싶었을 뿐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요즘 사람들이 정태춘 음악에 끌리는 이유를 생각해보면, 아마 그 '일상성' 때문일 것 같다. 거창한 메시지나 강렬한 감정보다는, 그냥 살아가는 일상 속에서 발견하는 작은 아름다움들을 노래하니까.
최근 몇 년 사이 '소확행'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작지만 확실한 행복. 정태춘의 "시인의 마을"은 그런 감각의 원조 격이 아닐까 싶다. 큰 꿈이나 야망보다는, 자연과 함께하는 소소한 일상에서 만족을 찾는 마음.
물론 시대적 배경은 다르다. 1970년대 말의 '시인의 마을'과 2020년대의 '소확행'은 사회적 맥락이 완전히 다르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추구하는 가치는 비슷한 것 같다. 복잡한 세상에서 단순한 것의 소중함을 아는 마음.
어릴 적 내가 썼던 세숫대야 속 달 이야기를 다시 생각해보면, 그때 나는 이미 정태춘이 말하는 '시인의 마을' 감성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거창한 달이 아니라 우리 집 마당의 작은 세숫대야에 비친 달을 보며 감동했으니까.
정태춘의 노래를 들으면서 깨닫는 건, 시적 감수성이라는 건 특별한 재능이 아니라 일상을 바라보는 태도의 문제라는 것이다. 자연을 친구로 여기고, 사소한 것에서도 의미를 찾으려는 마음. 그게 바로 시인의 시선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