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나는 자연의 친구, 사색의 시인"

천피디의 이븐한 음악 일기 #15 -정태춘-시인의 마을

by 꼬르륵

어릴 적 나는 시를 썼다.

처음엔 수업 시간에 내준 과제였다. 시 한 편 써오라는 숙제를 대충 해냈는데, 담임선생님이 의외로 좋아하셨다. 일기 대신 시를 써도 된다고 하셨고, 나는 그걸 핑계 삼아 종종 시를 적었다. 일기장은 빽빽하게 써야 하지만, 시는 몇 줄만 써도 됐으니까. 그래도 늘 "참 잘했어요" 도장이 따라왔다.

그러다 고등학생이 된 어느 날, 우연히 초등학교에 들렀다. 그때 한 선생님이 나를 보며 말했다. "너 예전에 썼던 시 기억나? 너무 좋아서 친구한테도 보여줬었어. 계속 쓰면 좋겠다 생각했는데."

기억이 잘 나지 않아 머쓱해하다가, 그 시가 대략 이랬다는 얘기를 들었다.


우리 집 마당에는 달이 하나 더 있다.

엄마가 두고 간 세숫대야

거기서 나를 수줍게 보고 있다.


없어졌다, 또 있고

없어졌다, 또 있고

자꾸 나타난다.


아마도 저 달은 나를 참 좋아하나 보다.


그 후 다시 시를 써보려 했지만 전혀 써지지 않았다. 예전엔 자연을 보면서 감탄했는데, 지금은 책상에 앞에 앉아 영어 단어 외우는 데 시간을 쓰고 있었으니까. 그때 나는 뭔가 중요한 걸 잃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연을 읽는 새로운 문법

정태춘의 〈시인의 마을〉을 처음 들었을 때 느낀 건 익숙함이었다. 그런데 곧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분명 자연을 노래하는 곡인데, 김민기의 "아침이슬"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아침이슬"이 자연 속에서 희망을 찾는 노래라면, "시인의 마을"은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일상을 그린 노래였다.

1970년대 말 정태춘이 이 곡을 발표했을 때, 한국 포크 음악은 이미 하나의 장르로 자리 잡고 있었다. 김민기가 개척한 길 위에서 정태춘은 자신만의 색깔을 찾아가고 있었다. 같은 자연이지만 접근 방식이 달랐다. 김민기가 자연에서 메시지를 읽어냈다면, 정태춘은 자연과 대화를 나누려 했다.

이 곡은 자연을 벗 삼아 살고 싶다는 화자의 마음을 담았다. 자연의 친구가 되고, 사색하는 시인이 되고 싶다는 내용으로 시작해서, 조용한 마을에서 펼쳐지는 일상적인 풍경들을 그려낸다. 지금 듣기에도 지나치게 낭만적이지 않고, 묘하게 단단한 감성이 있다.


사전심의 시대의 또 다른 선택

흥미롭게도 정태춘의 초기 음반들은 공연윤리위원회의 사전심의를 받아야 했다. "시인의 마을"도 예외가 아니었다. 일부 가사가 개작되어 발표되었는데, 이 경험이 훗날 정태춘을 가요 사전심의 제도 폐지 운동에 나서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김민기가 "아침이슘"으로 금지곡의 아이콘이 되었다면, 정태춘은 좀 다른 방식으로 저항했다. 직접적인 대결보다는 끈질긴 법적 투쟁을 선택했다. 1996년 헌법재판소의 사전심의 제도 위헌 판결을 이끌어낸 것도 그런 노력의 결과였다. 지금 우리가 자유롭게 음악을 듣고 만들 수 있는 건 이런 선배들의 투쟁 덕분이다. 그런데 정작 정태춘 본인은 거창한 의미 부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그냥 자연스럽게 노래하고 싶었을 뿐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일상이 된 시적 감수성

요즘 사람들이 정태춘 음악에 끌리는 이유를 생각해보면, 아마 그 '일상성' 때문일 것 같다. 거창한 메시지나 강렬한 감정보다는, 그냥 살아가는 일상 속에서 발견하는 작은 아름다움들을 노래하니까.

최근 몇 년 사이 '소확행'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작지만 확실한 행복. 정태춘의 "시인의 마을"은 그런 감각의 원조 격이 아닐까 싶다. 큰 꿈이나 야망보다는, 자연과 함께하는 소소한 일상에서 만족을 찾는 마음.

물론 시대적 배경은 다르다. 1970년대 말의 '시인의 마을'과 2020년대의 '소확행'은 사회적 맥락이 완전히 다르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추구하는 가치는 비슷한 것 같다. 복잡한 세상에서 단순한 것의 소중함을 아는 마음.


세숫대야 속 달의 의미

어릴 적 내가 썼던 세숫대야 속 달 이야기를 다시 생각해보면, 그때 나는 이미 정태춘이 말하는 '시인의 마을' 감성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거창한 달이 아니라 우리 집 마당의 작은 세숫대야에 비친 달을 보며 감동했으니까.

정태춘의 노래를 들으면서 깨닫는 건, 시적 감수성이라는 건 특별한 재능이 아니라 일상을 바라보는 태도의 문제라는 것이다. 자연을 친구로 여기고, 사소한 것에서도 의미를 찾으려는 마음. 그게 바로 시인의 시선이 아닐까.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새벽 5시 15분의 깨달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