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피디의 이븐한 음악 일기 #18 - 남인수·이난영, 제3일요일
김추자로 시작한 음악 일기가 벌써 193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86년생이 1930년대 노래를 듣고 있다니 생각해보면 흥미로운 일이다. 거의 한 세기를 거슬러 올라간 음악이지만, 듣다 보니 의외로 낯설지 않았다. "제3일요일"을 처음 들었을 때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창법과 어딘가 어색한 발음, 낡은 녹음 상태 때문에 마치 다른 세계의 음악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가사 첫 줄에서 "헬로우"가 나오는 순간 조금 놀랐다. 잠깐, 1930년대에 이미 "헬로우"라고 했다고?
[남인수, 이난영 - 제3일요일]
https://www.youtube.com/watch?v=7RA8XyuNFhM
1930년대는 일제강점기 중반부로, 정치적으로는 극도로 억압적이었지만 동시에 경제적·문화적으로는 급속한 근대화가 진행되던 복잡한 시기였다. 혁명적 노동조합과 농민조합 운동이 활발해질 정도로 사회적 긴장이 고조되었지만, 역설적으로 도시 문화는 더욱 화려해졌다.
경성(서울)을 중심으로 한 급속한 도시화는 새로운 계층을 탄생시켰고, 라디오와 유성기 음반의 보급, 극장과 카페의 확산은 대중문화가 꽃필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제3일요일"이 바로 이런 시대적 배경 속에서 탄생한 것이다.
"헬로우 헬로우 양장 입는 아가씨 / 웬일입니까 옥색치마저고리에 고무신을 신었네 / 어떻수 야 좋은데"
가사를 찬찬히 뜯어보니 완전히 놀랐다. 양장과 한복을 대비시키고, 연지와 분을 언급하고, 심지어 "커피차"까지 등장한다. 거의 백 년 전에 이미 이런 도시적이고 세련된 감각이 있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 상황을 알고 보니 이해가 됐다. 1930년대는 모던 문화의 전성시대였던 것이다. 커피는 1902년 손탁호텔에서 시작되어 1930년대에는 대중화되었고, 카페는 단순한 찻집이 아니라 술을 팔고 댄스를 하는 최첨단 문화 공간이었다. "커피차나 마시자"는 그냥 음료를 마시자는 게 아니라 가장 모던한 데이트를 제안하는 말이었던 셈이다.
"헬로우 헬로우 연지 찍던 얼골엔 분만 바르고 / 술 마시던 입술에는 커피차나 마시자"
이건 그냥 1930년대 버전의 '외모 업그레이드' 노래 아닌가? 양장 차림의 여성을 향한 남성의 구애, 전통과 모던함 사이에서 흔들리는 심리, 커피와 술이라는 소품까지. 지금 봐도 충분히 트렌디한 소재들이다.
1930년대 모던걸은 단발에 가슴과 허리를 강조하는 복식으로 여성의 신체를 강조했다. 다방이나 카페에서 일하는 여성, 회사의 여사무원, 백화점 직원, 미용사, 전화 교환수 등 경제력을 가진 직업여성들이 바로 모던걸이었다. 이들은 직업상 양장을 입었고, 남성과 접촉할 기회도 많았다.
"양장 입는 아가씨"와 "옥색치마저고리에 고무신"의 대비는 단순한 패션의 차이가 아니었다. 이는 젊은 세대와 기성세대의 갈등, 전통과 근대의 충돌, 조선과 서구 문화의 대립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표현이었다. 한 곡 안에 당시의 복잡한 사회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던 것이다.
남인수와 이난영이 주고받으며 부르는 방식도 독특하다. 요즘 듀엣처럼 화음을 맞추는 게 아니라 마치 연극 대사처럼 서로 번갈아가며 노래한다. 남인수의 부드럽고 감미로운 목소리와 이난영의 애절한 음색이 만나 묘한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특히 이난영은 '목포의 눈물'로 유명한 가수인데, 그 특유의 애절함이 이 곡에서는 조금 다르게 느껴진다. 슬픔보다는 설렘에 가까운 감정이랄까. 남인수 역시 당시 최고 스타답게 여유롭고 매력적인 음색으로 상대방을 유혹한다.
1930년대는 일제의 문화정치 시기로, 표면적으로는 문화적 자유를 허용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동화정책을 추진했다. 이런 억압적 환경에서 대중가요는 직접적인 저항보다는 은밀한 현실 도피와 로맨스를 통해 민중의 감정을 달래는 역할을 했다.
"제3일요일"이 바로 그런 노래였다. 일제강점이라는 암울한 현실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지만, 모던하고 경쾌한 멜로디로 사람들에게 잠시나마의 위안과 즐거움을 선사했다. 억압받는 현실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음악의 힘이 여기에 있었다.
이런 시대적 배경을 알고 나니 이 곡이 더욱 놀랍게 느껴진다. 이미 1930년대에 동서양 문화가 섞인 가사, 남녀 듀엣의 형태, 그리고 무엇보다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중독성 있는 멜로디가 완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지금 우리가 듣는 K-pop의 DNA가 여기서부터 시작됐다는 확신이 든다. 서구 문화와 전통 문화의 절묘한 조화, 시대상을 반영한 가사, 대중성과 예술성의 균형 등 현재 한국 대중음악의 특징들이 이미 90여 년 전에 나타나고 있었다.
"제3일요일"을 들으면서 느낀 건, 좋은 음악은 시간의 벽을 넘나든다는 것이다. 물론 지금 들으면 어색한 부분도 있고, 가끔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는 부분도 있다. 하지만 그 시대 젊은이들이 느꼈을 설렘과 로맨스, 그리고 복잡한 현실 속에서도 꿈꾸었던 모던한 일상에 대한 동경은 지금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86년생이 1930년대 노래를 들으며 공감한다는 것이 다소 의외일 수도 있지만, 생각해보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다. 거의 백 년이 다 되어가는 이 노래가 여전히 누군가에게는 의미 있는 음악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