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피디의 이븐한 음악 일기 #22 - 한영애, 코뿔소
대중을 부르는 목소리
라디오 생방송 스튜디오에서 들으면 '클래스가 다르다'는 느낌이 드는 가수분들이 있다. 지금 이 목소리의 주인공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어쩔 수 없이 귀 기울이게 만드는 흡입력과 카리스마를 가진 분들. 그런 음악을 한 곡 듣고 나면 마치 드라마를 하나 세게 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개인적으로 내게는 조용필, 임재범, 윤도현, 한영애, 나훈아, 김현철 이런 분들이 그렇다. 이분들은 단순히 노래를 부르는 게 아니라 진지하게 삶을 이야기하는 느낌이어서 숙연하게 경청하게 된다. 사운드가 남다른 스튜디오에서는 더 그렇다.
촛불집회의 울림
어느 해인가. 저녁 8시 밤 프로를 할 때였다. 심란한 정치 사건이 발생한 날 진행 후 당시 사수였던 70대 M사 출신 선배님께서 한영애의 '조율'을 선곡했다. 실제로 이 곡은 2016년 12월 3일 박근혜 퇴진 국민 비상행동 6차 촛불집회에서 한영애씨가 열창한 노래였다. 익히 들었던 노래였는데 사수 PD님의 뒤에 서서 함께 클로징을 하던 그 순간은 머릿속 한 장면으로 박제됐다. 시위 현장에서 한영애씨의 목소리로 그 곡을 들었다면 얼마나 전율이 느껴졌을까.
그런 한영애씨에게는 대중을 부르는 특별한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 목소리는 단순히 듣는 이의 귀를 즐겁게 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고, 무언가를 결심하게 만들고, 때로는 광장으로 이끌어내는 힘이 있다. 그래서 그녀가 부른 또 다른 곡이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온다.
[한영애-코뿔소]
https://www.youtube.com/watch?v=IWkxgOetOn4
이 곡의 가사는 험한 세상을 코뿔소처럼 달려가야 한다고 노래한다. 자신의 모든 문제를 스스로 헤쳐서 밀고 나가야 하고, 한 번 누워버리면 다시 일어설 수 없다는 강인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코뿔소는 누울 수가 없다는 표현이 특히 인상적이다.
최근 들어 이런 메시지가 참 공감이 된다. 완벽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문제를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당당하게 직면하는 것. 그렇게 자신만의 근육을 키워야 끝까지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이 많이 드는 요즘이다. 회사일도 그렇고 내 개인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언젠가 깊은 여운을 남겨 사진으로 찍어둔 문장도 어딘가 일맥상통하는 것 같아 함께 남겨본다.
"나는 씨앗이 땅속에 들어가 무거운 흙을 들치고 올라올 때 제힘으로 들치지 남의 힘으로 올라오는 것을 본 일이 없다." - 남강 이승훈(한국의 교육자·독립운동가, 오산학교 설립자)
이 말처럼 결국 자신의 문제는 자신이 해결해야 하는 것 아닐까. 코뿔소처럼 묵묵히, 그러나 강하게.
7080 세대의 레전드
한영애씨에 대해서 더 상세히 알아보자면, 그녀는 7080 세대를 대표하는 레전드다. 독특한 허스키 보이스로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유니크한 음색을 자랑했다. 그녀가 부른 노래는 누구든 단번에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독보적이었다.
데뷔 당시만 해도 여성 가수가 허스키한 목소리로 노래한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윤시내씨와 함께 새로운 여성 보컬 스타일을 제시하며 한국 가요계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특히 블루스 장르에서는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R&B, 포크록, 트로트, 블루스 등 다양한 장르에서 탁월한 음악적 성과를 보여줬으며, 5집에서는 트립합을, 6집에서는 R&B와 레게를 시도하며 끊임없는 음악적 도전을 이어갔다.
연극 배우가 만든 목소리
한영애씨의 목소리는 저음이 매력적이었지만, 사실 초고음까지도 자유자재로 소화하는 넓은 음역대를 자랑했다. 이런 역량은 연극 배우로서 쌓은 탄탄한 발성과 목 관리 덕분에 가능했다.
그녀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앨범에는 '누구 없소', '바라본다', '코뿔소' 등 명곡이 대거 포함됐다. 특히 '바라본다'는 당대 최고의 음악가들이 자발적으로 코러스에 참여한 전설적인 곡이었다.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 17위에 선정된 그녀의 앨범은 그 음악성과 가치를 입증하며, 한영애씨를 여전히 최고로 평가받게 만들었다.
시대를 관통하는 메시지
한영애씨의 '조율'이 촛불집회 현장에서 울려 퍼졌고, '코뿔소'는 개인의 삶에서 강인함을 잃지 말라고 속삭인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시대를 관통하는 무언가가 있다. 때로는 광장에서, 때로는 개인의 일상에서 우리에게 힘을 주는 그 특별한 울림 말이다.
코뿔소처럼 살아간다는 것. 쉽지 않지만,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 순간들이 우리에게는 분명 있다. 한영애씨의 목소리가 그런 순간들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