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천꼬르륵 Aug 17. 2021

도망가자, 내 엄마가 있는 곳으로

경상도 시어머니와 서울 며느리의 공동육아기록

친정엄마. 참 묘한 단어다. 내게 항상 져 줄 것 같은. 실제로도 그런. 나도 모르는 나의 피곤함과 고단함을 나보다 먼저 알아차리고 걱정해주는. 그러면서도 이상하게 오래 붙어있으면 꼭 한 번씩 싸우게 되는 그런 사람을 일컫는 단어. 친. 정. 엄. 마.


둘째를 시댁에 맡기느냐 마느냐의 문제, 출산 후 신체 변화, 육아, 그리고 지친 남편과의 예민한 대화. 이런 것들을 거치면서 나는 엄마가 있는 집이 그리워졌다.


속이 따뜻해지는 엄마의 쇠고기 뭇국, 텃밭에서 잘라 온 상추로 비빈 비빔밥, 상추 비빔국수, 새벽이면 안개가 퍼져있는 마당, 저녁 무렵 모기를 쫓기 위해 태우는 연기, 풀벌레 소리, 마당에서 노는 고양이들, 마당에 내리는 빗소리, 마당의 화분들, 새벽 경운기 소리...


당장이라도 그곳에 가고 싶었다. 그곳은 내 마음이 쉴 수 있는 유일한 곳이기에.


그런데 둘째를 데리고 잠시 친정에 다녀오고 싶다고 말씀드리자 어머님은 내켜하지 않으셨다.

"에~아도 어린데 그러지 말고 차라리 너랑 나랑 애들 다 데리고 다 같이 선산으로 내려가서 지내보면 어떻겠나?"

'...?'

선산은 시댁이다.


너무도 지친 마음에 어렵게 드린 말씀인데 어머님의 제안을 듣자마자 나는 순간 지쳐서 서러워 눈물까지 날 뻔했다. 솔직히 지난 주말 예민한 대화가 오갔던 남편으로부터 벗어나고 싶기도 했다. 어쨌든 시댁은 남편의 부모님이 계신 곳이 아닌가. 시부모님의 배려를 받아도 이럴 때 마음이 쉴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어머님, 사실은 제가 친정에 가고 싶은 건..."


나는 어머님이 안 계신 지난 주말 남편과 마음이 상하는 일이 있었노라고. 그리고 제가 둘째를 데리고 내려가면 어머님도 첫째 잘 때 주무시고, 낮잠도 같이 주무실 수 있으니 수월하시지 않을까 생각도 들었노라고 솔직하게 내 생각을 말씀드렸다. 어머님은 내 말씀을 들어보시고는 네 마음 다 알겠다 하시며 그럼 그렇게 해보라고 하셨다. 정말 어머님께서 대화가 가능한 분이라서 참 감사했다.


그리고 내가 이 과정을 굳이 글로 남기는 이유는 종종 부모님이 답답하다고 느껴지는 순간 그냥 등을 돌리고 돌아서지 말고 솔직하게 한번 더 대화를 시도해보라는 제안을 하고 싶어서다. 자식들을 돕고자 하는 마음이 있으신 한, 부모님의 귀는 열려있다.




어쨌든 그렇게 드디어 친정에 왔다!  

문을 열면 초록이 무성한 산이 보이고, 찌르르 매미 소리가 났다.


그동안 시어머니와 지내는 딸이 행여 불편할까 카톡으로 간단히 안부만 묻던 엄마는 남편이 서울로 나서자마자 속사포처럼 내게 말을 쏟아냈다.


왜 그렇게 말랐나. 아만 먹이고 너는 밥을 안 먹나. 시엄마가 해준 보약은 잘 먹나. 양서방도 힘들겠다. 너거 시어머니도 힘들겠다. 이따 저녁에 뭐 해주꼬. 아는 새벽에 몇 번 깨나. 엄마는 내일 일하러 나가야 된다. 내가 국이랑 반찬이랑 다 해놓을 테니까 알아서 꺼내먹어라. 아이고, 너거 시어머니도 며느리 밥해 먹이느라 힘들겠다. 아들만 챙기는 거랑 며느리까지 챙기는 거는 다르지.(×반복)


엄마의 말에 나는 주로 '응~', '아니~', '엄마 근데 나 저기 기저귀 좀', '엄마 근데 나 저기 젖병 좀' 하며 영혼 없는 대답을 했다. 그러려니. 엄마는 왔다 갔다 몸은 바쁘게, 입도 더 바쁘게 엄마가 하고 싶은 말을 계속했다.


나는 그런 엄마의 귀를 유심히 살폈다. 엄마의 귀에는 작년부터 끼기 시작한 보청기가 있었다.

'작년보다는 잘 들리나 보네'

엄마 나이 예순아홉. 내년이면 엄마는 칠순이다. 그래도 엄마는 요양보호사로 계속 일을 하고, 한쪽 수족이 불편한 아버지를 보살피신다. 아무리 육아가 힘들어도 엄마에게 도움을 받는 걸 기대조차 안 한 이유다.


내가 초등학생일 때까지만 해도 우리 엄마는 멋쟁이 자모회장(자모회 회장)이었다. 경상도 여자였던 엄마는 충청도 엄마들과는 일하는 스타일부터 달랐다. 직설적이고 화끈했다. 또 백화점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어서인지 엄마들끼리 모여있으면 엄마는 어딘가 맵시가 있었다. 그러면서도 씨름협회 부회장인 아버지 앞에서는 나서지 않았다. 엄마가 잘 말하는 '눈치껏'이라는 말처럼 엄마는 어느 자리를 가도 치고 빠지는 걸 잘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그 기질이 어디가랴. 나는 아버지의 보수적인 기질과 엄마의 실리적인 기질이 결국엔 부딪히는 것을 꽤 많이 봤다.


어쨌든 엄마는 시골에 살아도 어딘가 세련됐었다. 내가 중학생이 되기 전까지는. 아버지가 고혈압으로 쓰러지시고, 장애인이 되신 후로 엄마는 변했다. 멋이란 걸 생각할 겨를 없이 억척같이 농사일을 하고, 빚도 내가면서 삼 남매를 키워냈다. 나는 엄마가 화장품을 돈 주고 사는 걸 본 적이 없다. 어쩌다 작은 이모나 판매원 아주머니들이 주면 그 때 발랐다.




"왜 이렇게 안 처먹어. 아는 내가 먹일 테니까 니나 먹어라"


하루는 내가 남긴 밥을 보고 애한테 젖병을 물리고 있는 내게 엄마가 말했다. 나는 쫓겨나듯 도로 밥 숟가락을 들다 피식 웃었다. 엄마 마음이 느껴지기도 했고, 만약 같은 말을 어머님이 하셨다면 어땠을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안 처먹는다고 하실 수 있느냐며 남편에게까지 말했을 것이다. '아이고, 며늘아. 니는 뭐 새 모이만큼 먹니'라며 예쁘게 말씀해주시던 어머님이 생각났다. 엄마는 나에게 안 처먹는다고 말해도 진심을 오해받지 않기에 당당하다. 하지만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그렇지 못하다. 같은 말이라도 기분이 상할까 조심조심이다.  


그런 간극을 느끼며 며칠을 지낸 또 어느 날, 이번에는 엄마가 퇴근하면서 장을 봐왔다. 봉지 안에는 커다란 웨하스가 있었다.

"와, 이거 오랜만이네~"

포장을 뜯고 한 입을 베어 먹는데 그 모습을 본 엄마가 하는 말.

"느그 어릴 때 웨하스 좋아했잖아. 니들이 웨하스 먹다가 바닥에 떨어뜨린 걸 주워 먹으면 그게 어찌나 맛있던지..."

'...'

그 순간 삼 남매를 시골에서 키워냈을 젊은 엄마의 모습이 그려졌다. 도대체 엄마는 우리를 어떻게 키워낼 수 있었던 걸까? 새벽 배송도 없고, 요즘같이 좋은 기저귀도 없고, 친정엄마도 곁에 없었던 그 시절에 엄마가 시골 일에, 애 셋에 얼마나 치였을지 혀가 내둘러졌다. 웨하스를 주워 먹었다던 엄마의 모습과 요즘 첫째가 떨어뜨린 밥알을 주워 먹는 내 모습이 겹쳐졌다.


'다들 그렇게 엄마가 되어가는 거구나... 그렇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맞은 밤. 첫째와 영상통화를 마치고, 둘째를 한차례 또 먹이고 누이니 밤 열 시가 넘었다. 저만치 엄마는 소파에 누워서 잠이 드셨다. 내려와서 자라고 해도 소파가 푹신하니 좋다는 엄마. 옆으로 누은 엄마 몸에 이불을 덮었다. 그러면서 엄마가 있는 집이라는 것만으로 밤새 애 보기가 수월해진 이 느낌은 뭔지. 일흔이 다 되어도 여전히 내게 의지가 되는 엄마 쪽을 보며 잠들었다.

작가의 이전글 모성애를 내려놔야하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