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의 노트
세 사람은 그 골목으로 향했다. 오늘 아침 할머니를 만났던 그곳. 어둠이 내린 골목은 고요했다. 가로등 불빛이 희미하게 길을 비췄다.
"여기가 맞지?"
채린이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응. 여기야."
미나가 대답했다. 아침에는 분명 이곳에 할머니의 구멍가게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평범한 골목길일 뿐이었다.
"여기서 태우면 되겠다."
준수가 말했다. 미나는 노란 노트를 꺼내 들었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노트를 바라봤다. 이 노트에 썼던 모든 소원들. 전교 1등, 예쁜 외모, 아버지의 승진, 그리고 최수빈이 사라지길 바랐던 무서운 소원까지. 그 모든 것이 이제 사라질 것이다.
"정말 괜찮아?"
준수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응. 괜찮아."
미나가 환하게 웃었다.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했다. 두렵기보다는 후련했다.
"어차피 진짜 내 거였던 적이 없었으니까."
채린이 가방에서 성냥을 꺼냈다. 아빠 책상 서랍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준비됐어?"
미나와 준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나는 노트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세 사람은 노트를 둘러싸고 앉았다. 채린이 떨리는 손으로 성냥을 그었다.
"치익-"
성냥에 불이 붙었다. 작은 불꽃이 어둠 속에서 흔들렸다. 채린이 조심스럽게 노트 모서리에 불을 붙였다.
불꽃이 천천히 노트를 타고 올라갔다. 노란 표지가 검게 그을리기 시작했다. 페이지들이 하나둘 오그라들었다. 미나가 썼던 글씨들이 검게 변하며 사라져 갔다.
'전교 1등이 되고 싶어.'
그 글씨가 불타 사라졌다.
'예뻐지고 싶어.'
그 글씨도 재가 되어 사라졌다.
'최수빈이 사라졌으면 좋겠어.'
가장 무서웠던 그 소원마저 불꽃 속으로 사라졌다.
준수가 쓴 글씨들도 함께 타올랐다. 엄마의 건강, 아버지의 억울함. 모든 소원이 연기가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
세 사람은 말없이 그 모습을 지켜봤다. 바람이 불어와 연기를 흩어놓았다. 불꽃이 점점 커지면서 노트 전체를 삼켰다.
그때였다.
"호호호..."
어디선가 낯익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세 사람이 깜짝 놀라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 희미하게 무언가가 보였다. 할머니의 구멍가게였다. 아니, 가게 같은 것이었다. 마치 신기루처럼, 아니면 오래된 사진처럼 흐릿하게 떠오른 가게의 모습. 그 앞에 할머니가 서 있었다. 미소를 띤 채로.
"잘했다, 아가들."
할머니의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멀리서 들리는 것 같으면서도 또렷했다.
"이제야 제대로 된 선택을 한 아이들을 만났구나."
할머니가 천천히 손을 흔들었다.
"너희는 행복할 거야. 진짜 행복을."
미나는 할머니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채린과 준수도 따라서 고개를 숙였다.
할머니의 모습이 서서히 흐려지기 시작했다. 가게도 함께. 마치 물에 번지는 수채화처럼, 윤곽이 흐릿해지고 색이 옅어졌다. 그리고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그 자리에는 높은 담벼락이 서 있었다.
"어...?"
채린이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담벼락으로 다가가 손으로 만져봤다.
"이게 뭐야...?"
분명히 실재하는 벽이었다. 차갑고 단단한 시멘트 벽. 이끼가 군데군데 끼어있고, 오래되어 보이는 벽.
"아까... 분명 여기 골목이 있었는데..."
준수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벽을 바라봤다.
미나는 천천히 일어나 벽에 다가갔다. 손을 뻗어 만져봤다. 차가웠다. 진짜였다. 이 벽은 오랫동안 여기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처음부터... 골목이 없었던 거야?"
미나가 중얼거렸다. 할머니도, 가게도, 그 골목도. 모두 환상이었던 걸까. 아니면 다른 세계였던 걸까.
바람이 다시 불어왔다. 세 사람은 동시에 뒤를 돌아봤다. 바닥에는 노트의 재만 남아있었다. 하지만 바람이 그 재마저 날려 보내기 시작했다. 검은 재들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마치 춤을 추듯이 빙글빙글 돌다가 하늘로 흩어져 사라졌다.
"끝났어..."
미나가 작게 말했다. 목소리가 떨렸다.
준수가 미나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괜찮아?"
"응... 괜찮아. 진짜로."
미나가 웃었다.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참았다. 슬퍼서가 아니었다. 후련해서였다.
채린도 다가와 미나의 손을 잡았다.
"우리 해냈어."
"응. 해냈어."
세 사람은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아무도 서둘러 떠나려 하지 않았다. 바람이 계속 불었다. 차가운 밤공기가 뺨을 스쳤다. 하지만 이상하게 따뜻한 기분이었다.
"집에 가야겠다."
준수가 먼저 말했다.
"응."
"내일 학교에서 보자."
"그래."
세 사람은 천천히 걸어 나왔다. 골목을—아니, 이제는 없어진 골목을 뒤로하고. 각자의 집으로 향하는 길은 달랐지만, 세 사람은 한동안 함께 걸었다. 아무도 먼저 헤어지고 싶어 하지 않는 것처럼.
다음 날 아침은 평소와 다름없이 시작됐다.
알람 소리에 미나는 눈을 떴다. 몸이 무거웠다. 어젯밤 늦게 잠들었기 때문이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거울로 다가갔다.
거울 속에 비친 얼굴.
미나는 한참을 거울을 들여다봤다. 예상했던 대로였다. 얼굴은 예전의 평범한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화려하지도, 특별히 예쁘지도 않은 그냥 손미나의 얼굴. 약간 처진 눈, 평범한 코, 도톰한 입술.
"이게 나지."
미나가 거울 속 자신에게 웃어 보였다. 거울 속 미나도 웃었다.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했다. 오히려 친근했다. 오랜만에 만난 옛 친구 같았다.
세수를 하고 교복을 입었다. 거실로 나가니 아빠가 벌써 식탁에 앉아 신문을 보고 계셨다. 엄마는 주방에서 아침 준비를 하고 계셨다.
"미나야, 아침 먹어."
"네."
미나는 식탁에 앉았다. 평범한 아침이었다. 김치찌개 냄새가 났다. 밥을 뜨면서 미나는 아빠를 힐끗 쳐다봤다. 아빠는 신문을 보시며 가끔 고개를 끄덕이고 계셨다.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아빠의 승진은 없었던 일이 됐겠지.'
미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아빠는 달라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편안해 보이셨다.
"아빠."
"응?"
아빠가 신문에서 눈을 떼고 미나를 보셨다.
"아빠는 지금 행복하세요?"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아빠가 잠시 놀란 표정을 지으시더니 신문을 내려놓으셨다.
"뭐 갑자기?"
"그냥... 궁금해서요."
아빠가 미나를 한참 바라보시다가 웃으셨다.
"물론이지. 아빠는 행복해."
"진짜요?"
"그럼. 우리 미나 같은 딸이 있는데. 엄마도 건강하시고. 직장도 있고.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있나?"
아빠의 대답이 너무 담담하고 자연스러워서 미나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저도 행복해요, 아빠."
미나가 작게 말했다.
"그래. 우리 딸 행복하면 아빠는 더 행복하지."
아빠가 미나의 머리를 쓰다듬으셨다.
학교 가는 길은 여느 때와 같았다. 같은 버스, 같은 정류장, 같은 풍경. 하지만 미나는 모든 것이 새롭게 느껴졌다. 아침 햇살이 유난히 따뜻했다.
학교에 도착하자 복도에서 담임 선생님과 마주쳤다.
"어, 손미나."
"안녕하세요, 선생님."
"잠깐만. 너 지금 시간 있니?"
"네."
"잠깐 교무실로 좀 와봐."
미나는 선생님을 따라 교무실로 갔다. 선생님이 책상 앞에 앉으시며 서류를 꺼내셨다.
"앉아."
미나가 의자에 앉았다. 선생님이 성적표를 보고 계셨다.
"미나야, 지난 중간고사 성적 말인데..."
미나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뭔가 오류가 있었던 것 같아. 다시 채점을 해봐야 할 것 같은데."
"아..."
"미안하구나. 네가 열심히 공부했을 텐데..."
선생님이 미안한 표정을 지으셨다. 하지만 미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 성적은 미나의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괜찮아요, 선생님."
미나가 환하게 웃었다.
"정확한 게 중요하잖아요. 다시 채점하시는 게 맞아요."
선생님이 미나를 조금 놀란 듯 바라보셨다.
"그래... 네가 이렇게 담담하게 받아들이니 선생님도 고맙구나. 대신 다음 기말고사 때는 진짜 열심히 해보자. 알았지?"
"네! 열심히 할게요."
"그래. 가봐."
미나가 교무실을 나왔다. 복도를 걸으며 미나는 속으로 웃었다. 이상하게 속이 시원했다. 이제 거짓이 없었다. 모든 것이 진짜였다.
교실로 향하는 복도에서 준수를 만났다.
"미나야!"
준수가 밝게 웃으며 다가왔다.
"준수야."
"괜찮아? 뭐... 달라진 거 없어?"
준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응, 다 원래대로야. 너는?"
"나도. 아침에 엄마한테 전화했는데..."
준수의 얼굴이 환해졌다.
"의사 선생님이 엄마 상태가 많이 좋아지고 계신대. 회복 속도가 빠르시래."
"정말? 다행이다!"
"응. 이번엔 제대로 된 치료니까...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희망적이래."
준수가 환하게 웃었다. 진심에서 우러나온 웃음이었다.
"너무 좋겠다, 준수야."
"응. 아빠도 힘내시는 것 같아. 우리 가족 다 함께 잘 헤쳐나갈 거야."
미나는 준수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미나야, 고마워."
준수가 진심을 담아 말했다.
"응?"
"네가 옳은 선택을 하게 해 줘서. 나도 옳은 선택을 할 수 있었어."
"나야말로 고마워. 네가 동의해 줘서."
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서로를 바라봤다. 복도에 아침 햇살이 비쳐 들어왔다.
"우리 이번 기말고사 열심히 하자."
준수가 먼저 말했다.
"응! 이번엔 진짜 실력으로!"
"그래, 진짜 실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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